▲ 연합뉴스 |
카다피의 비참한 죽음은 북한과 김정일 일가에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오랜 기간 맺어온 가시적인 경제관계뿐 아니라 세습체계를 구축하고 있는 북한 내부사정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북한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다만 카다피 사망 직후 북한 내부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반응이 포착되고 있다. 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카다피 사망일 다음날 곧바로 호위사령부를 방문했다는 것이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10월 22일발 소식을 통해 “김정일 동지께서 제985군부대 지휘부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985부대는 호위사령부의 부대명이다. 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부대에 오기 전 별다른 예고 없이 급작스럽게 방문했으며 취사장까지 들려 장병들을 격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카다피 사망 직후 감행된 김 위원장의 호위사령부 전격 방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한 전문가는 “호위사령부는 김정일 일가와 관련된 건물들을 직접 호위하는 특수한 부대다. 카다피 사망 이후 김 위원장이 호위사령부를 긴급 방문했다는 것은 분명 카다피를 의식했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최근 리비아 현지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이 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는 자국 교민들에 대해 국내로 돌아오지 말라는 귀국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현재 리비아에는 주재원과 군 교관, 외화벌이 일꾼 등으로 파견된 현지교민이 200여 명 된다. 이들은 내전 이후 지금까지 발이 묶여 리비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최근 리비아 현지 교민에 대해 귀국 금지령을 내렸다는 것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 몰아친 혁명의 바람이 북한 내부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사전에 막겠다는 포석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지난 1989년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사망 당시에도 일부 대학에 휴교령을 내려 외부 바람을 차단한 바 있다. 두 눈으로 리비아 혁명 과정과 카다피의 최후를 목격한 교민들이 내부로 들어온다면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최근 미국의 대북방송<RFA>와의 인터뷰를 통해 “카다피는 리비아정권을 42년 동안 잡고 있었다. 김 위원장은 카다피의 말로를 보고 분명 많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정권을 몇 십 년 동안 확실히 잡고 탄압했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루마니아 출신으로서 차우셰스쿠 정권의 말로를 지켜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번 발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 카다피 사망 이후 공식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과에 대해 면밀히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최근 일련의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북한당국이 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3대 후계세습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김정일 일가 입장에서는 리비아 사태와 카다피 사망이 분명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혁명기념일마다 직접 축전 ‘끈끈’
▲ 카다피(왼쪽)가 1982년 10월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그는 4박5일간의 방북에서 양국 간 친선 및 협조에 관한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사진출처=북한 <노동신문> |
양국은 오랜 기간 동안 제3세계권 반미동맹국으로 협조했다. 특히 두 나라는 최근까지 군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리비아는 북한의 주요 무기수출국이다. 리비아는 탄도미사일 등 상당량의 북한무기를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때 핵개발을 위해 북한으로부터 기술적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 카다피는 직접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전대미문의 극진한 환대로 카다피를 맞았으며 ‘우방 중 우방’으로 리비아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김정일 위원장 역시 리비아의 혁명기념일마다 카다피에게 직접 축전을 보내는 등 인간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북한은 최근까지도 나토군의 리비아 공격에 대해 ‘내부간섭’으로 규정하며 끝까지 카다피를 옹호했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