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월 6일 열린 야권 대통합 추진모임 ‘혁신과 통합’ 발족식.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 자리는 문 이사장이 정치권에 발을 담근 뒤 기자들과 처음으로 갖는 식사 자리요, 처음으로 갖는 단독 기자간담회 자리였던 것이다. 스스로도 놀랍고 어색했던지 문 이사장은 이날 간담회를 마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도 제가 정치권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정체성이 헷갈립니다. ‘정치 밖의 정치인’이라고도 하는데 범야권이 통합된 정당에 참여할 거고 그게 본격 정치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애매한 상태입니다. 아직 정치인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런 인사 안하려고 했는데 예전에(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 출입했던 기자들이 ‘회포 좀 풀자’고 해서 추진하다가 그에 앞서 먼저 다 같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늘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렇다면 문 이사장에게 ‘회포 좀 풀자’고 했다는 옛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그와 이런 식사를 겸한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을까. 답은 ‘아니올시다’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에 출입하다 현재 국회에 출입하는 한 야당 반장은 “오늘 오찬 간담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문재인이 정치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이해하는 듯한 기자는 “저서(‘문재인의 운명’)를 내고도 출입기자들에게 책을 안 돌리는 정치인은 처음 봤다”고 농을 던지기도 했다.
문 이사장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손학규 대표를 제친 지 오래 된 범야권의 기대주임을 감안하면 이날 간담회 자리의 어색함과 놀라움은 좀 이상한 일이다. 이는 단지 그가 정치에 발을 담근 지 얼마 안 된 정치신인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범야권 대통합의 전도사로 발 벗고 나선 지 오래 됐음에도 그가 줄곧 자신을 낮추는 말과 행보를 보여줘 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몸 낮추는 문재인’의 모습은 “나는 사실 정치는 잘 모르고, 스스로를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라고 말하는 데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는 “민주당만으로는 안 된다” “지역주의 정치를 깨뜨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민주당을 깍듯이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일 민주당 의원모임 생활정치연구소 주최 월례포럼에 강연자로 나섰을 때 그는 “민주당이 ‘혁신’과 ‘통합’의 선두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7일 기자간담회 자리에서도 문 이사장은 “민주당은 규모 면에서도 범야권에서 제일 크고 그야말로 야권의 본류”라며 “민주당이 맏형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 내부에서 “범야권 대통합은 민주당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에 대해 전혀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준 것이다.
민주당에 대해서만 몸을 낮추는 게 아니다. 문 이사장은 7일 간담회에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국가 지도자로서 역량을 갖췄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안 원장이) 지금까지 약간의 정치적 행보만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만한 국민적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능력이 있다는 것”이라며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이사장은 더 나아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처럼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기려면 안 원장이 나서야 한다”면서 “만약 내년까지도 안 원장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계속된다면 (그를) 우리 쪽 진영의 대표선수로 인정해야 하고 우리가 돕고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일 수 있는 안 원장을 ‘우리 쪽 대표선수’라고까지 치켜세운 것이다.
▲ 10월 13일 ‘시민이 시장입니다 시민 발언대’에서 문재인 이사장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뉴시스 |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좀 설명이 부족한 것 같다. 우선 지난 10·26 재·보선 당시 마치 자신의 선거인 것처럼 열심히 지원했던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패배한 경험이 문 이사장을 일정 정도 위축시켰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부산 동구청장 선거는 민주당 후보로 나선 이해성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선거가 아니라 ‘문재인의 선거’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여기서 승리할 경우 PK(부산·경남)에서 문 이사장의 파괴력이 확인되고, 그렇게 되면 대선주자로서의 입지가 한층 단단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쏟아졌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이해성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한나라당 정영석 후보(51.1%)에 14.5%포인트 차로 패한 것이다. 이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출마한 데다 최근 PK지역 여론조사에서 여권에 대한 민심이반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14.5%포인트는 너무 큰 표차였다. 내년 총선에 앞서 부산에서부터 야당 바람을 불러일으키려 했던 문 이사장에게도 적잖은 타격이 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에 대해 한 정치컨설턴트는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서는 ‘문재인 효과’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며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얘기를 들어봐도 문 이사장이 현장 유세에 나섰을 때 지역 주민들 반응이 통 시원찮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문 이사장으로선 정치 초년병으로서 한계를 절감했을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2003년 새천년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이 떨어져 나온 뒤부터 시작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도 문 이사장이 극도로 언행을 조심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보인다. 분당 이후 노 전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이른바 ‘한-민 공조’를 통해 헌정사상 최초로 국회에 의해 탄핵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됐지만 그 뒤에도 호남 민심은 새천년민주당으로 향했고, 이는 2006년 지방선거 참패와 이후의 극심한 레임덕 현상으로 이어졌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새천년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쳤지만 대선 결과는 최악의 참패였다. 정권을 빼앗긴 뒤에도 노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에 대한 검찰 수사는 계속 됐고 결국 노 전 대통령은 고향마을의 부엉이바위에서 몸을 던져야 했다.
문 이사장으로선 일종의 ‘분열 트라우마’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문 이사장은 7일 간담회에서 야권통합 방법론을 둘러싼 민주당 내부 갈등과 관련해 “통합과 관련해 민주당이 내홍을 겪거나 깨지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는 “그럴 거라면 통합은 안하느니만 못한 게 된다”며 “그런 분열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을 힘들게 했던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또 “민주당이 외연을 확장함으로써 집권을 가능케 하자는 것일 뿐 민주당에게 어려움을 줄 생각은 전혀 없다”며 “‘혁신과 통합’은 통합 과정에서 지분을 챙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고 강조했다. 모두 민주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가 담긴 발언들이다.
이 같은 문재인 이사장의 ‘몸 낮추는 정치’ ‘극도로 조심하는 정치’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한나라당 내에서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의원은 “문재인이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개인적인 욕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사심 없는 자세, 헌신하는 자세는 기성 정치인들에게선 찾기 힘든 모습이며 국민들은 이런 모습에 감동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문 이사장이 정권 교체를 갈망하는 ‘또 한 명의 국민’이라면 모를까 정권 교체를 주도해야 하는 범야권 대선주자라면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는 많은 전문가가 문 이사장의 단점으로 “권력의지가 안 보인다”고 지적하는 것과 무관치 않다. 한 정치평론가는 “문 이사장은 말 그대로 ‘문재인의 운명’이 떠밀지 않는다면 굳이 자신이 대선에 나설 이유가 없고, 정권 교체만 된다면 자신은 그냥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그런 식이라면 정권 교체에 그가 기여할 바도 그만큼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의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다 보니 부산 동구청장 선거 때에도 바람을 일으키지 못했고 범야권 통합 과정에서도 광폭행보에 나선 손학규 대표에게 밀리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결국 문 이사장은 이제 ‘문재인의 운명’의 화살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헌신자로 남느냐, 주도자로 나서느냐.’ 문 이사장의 실존적 고민의 해답이 어느 쪽일지 몹시도 궁금하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