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전 원내대표(오른쪽)는 야권통합 절차와 방식을 두고 손학규 대표(왼쪽) 등 민주당 지도부와 이견을 보이면서 반 통합파로 몰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박 전 원내대표가 주장하는 순차적 통합론은 ‘n분의 1 자격 통합’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지지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사실 박 전 원내대표가 반 통합파로 몰리고 있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혁신과 통합’에 참여해 야권통합 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지난 8월 언론 인터뷰에서 야권통합에 대한 DJ의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08년 여름 DJ가 서거하기 2주일 전쯤 이 전 총리와 한명숙 전 총리,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DJ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이 자리에는 당시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 문성근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 대표 등과 박지원 전 원내대표도 참석했다. 이 전 총리가 전한 당시 DJ의 발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합을 해야 한다. 모든 세력이 통합을 해야 하는데, 민주당이 70%고 나머지가 30%니까 민주당이 70을 먹고 나머지에 30을 주겠다는 자세로 통합하려 하지 말고, 내가 70%지만 70을 내주고 30%만 먹고도 통합하겠다, 이런 자세로 해야 한다. 이건 내가 죽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이다.”
DJ는 며칠 뒤 입원을 했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야권통합을 이루라’는 말이 그의 정치적 유언이 된 셈이다. ‘뼛속까지 DJ맨’인 박 전 원내대표에게 이 같은 DJ의 유훈이 얼마나 큰 무게감으로 다가갔을지는 이해되고도 남는다.
그런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반 통합파의 수장인 것처럼 포지셔닝된 이유는 뭘까. 야권통합 절차와 방식을 두고 그가 손학규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와 이견을 보이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손 대표는 통합 참여 세력이 한 데 모여 한 번에 통합정당 지도부를 뽑는 ‘원샷 통합론’을 폈다. 반면 박 전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새 지도부를 먼저 뽑고, 새 지도부가 통합협상을 벌여야 한다는 ‘순차적 통합론’을 폈다. 이 과정에서 ‘60년 전통의 민주당이 어째서 n분의 1 자격으로 통합해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일부 국회의원과 원외 지역위원장들이 박 전 원내대표 편에 섰다. 국회의원·지역위원장 연석회의 다음날인 지난 15일 오전에도 20여 명의 의원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는 서종표 전혜숙 전현희 의원 등 친손학규 그룹으로 분류되는 의원들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대의원 3분의 1(약 4000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 민주당 단독 전당대회 개최를 요구하려고 하는 원외지역위원장들도 대부분 박 전 원내대표와 가까운 인사들인 것으로 전해진다. 야권통합에 적극적인 측에서 보기에는 박 전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일종의 ‘반 통합 세력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할 만하다.
이를 두고 민주당 내에서 통합에 적극적인 인사들조차도 “손학규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지도부가 민주당 해산을 동반하는 야권통합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법과 당헌·당규를 무시한 것은 물론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 당원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설명과 설득조차 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당내에서 야권통합 추진 방식을 둘러싸고 공개적인 반발이 나올 때조차 손 대표 주변에선 “민주당 당권을 노려 온 사람들로선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 당권주자의 일로 치부하면서 밀어붙이기식 통합을 추진해 온 것이다.
이에 대해선 지도부에서조차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당 지도부의 한 인사는 “통합의 당위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 대표에게 협조하고 있지만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당내 반발이 거세게 일었을 때 최고위원회의를 하는데 손 대표가 당을 없애고 합당을 하는 것과 관련된 법적, 제도적 사항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면서 “정치권에 들어온 지는 오래됐지만 보건복지부 장관, 경기도지사 등 당 밖에 있었던 시간이 많았던 데다 비교적 안정된 한나라당에 몸담았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전했다.
하지만 통합 추진 과정에서 아무리 문제가 있다고 해도 박 전 원내대표의 최근 행보에 대해서는 ‘너무 나갔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반 통합파로 찍힐 정도로 ‘몽니’를 부리는 이유가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냐는 얘기다. 당 일각에선 그가 내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분을 확실히 챙기려 한다는 의혹의 시선과 함께 “박지원이 ‘큰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이에 대해 박 전 원내대표 측은 “집단지도체제 하에서 누가 지분을 챙길 수 있다는 얘기냐”며 강하게 부인한다. 또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뜻은 강하지만 그 이상의 욕심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2008년 총선을 통해 정계로 복귀한 박 전 원내대표는 ‘판 메이커’가 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당 안팎의 우수한 인재들이 경쟁할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줌으로써 정권교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당대표 경선 당시 대선주자들이 출마하지 않을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박 전 원내대표는 “지지율 5%도 안 나오는 사람들이 뭘 재고 있느냐”며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천정배 추미애 다 나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판 메이커’로서 자신이 중심에 서서 야권통합과 정권교체의 대역사를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로서는 최근 손학규 대표 등 현 지도부가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다른 한편으로 박 전 원내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DJ의 적자’이자 민주당의 뿌리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박 전 원내대표가 야권통합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을 감안하고 있는 것 같다”는 해석도 내놓았다. 정당이나 세력 간 통합은 거의 다 된 것 같다가도 아주 작은 부분에서 틀어질 수 있는데 현재의 민주당 지도부는 아무런 ‘출구전략’도 없이 통합에만 ‘올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야권통합이 무산되면 그 충격을 수습하고 추스르는 책임은 오롯이 민주당의 몫이 된다”며 “민주당의 뿌리랄 수 있는 박 전 원내대표가 이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지도부를 견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유 있는 몽니’라 해도 박 전 원내대표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는 양상이다. 우선 야권통합 추진 과정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통합의 당위성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더욱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이 11월 20일 첫 ‘민주진보통합정당 추진 연석회의’ 개최, 27일 창당준비위원회 구성, 12월 17일 창당대회 개최로 이어지는 큰 틀에 합의한 데다 한국노총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 외부 세력이 속속 결합하고 있는 상황도 ‘사소한 불만’을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
“반드시 야권통합은 이뤄야 한다”는 박 전 원내대표의 강한 의지와 달리 그의 주변에 모여 있는 의원들이 드러내놓고 반 통합적 언행을 일삼는 것도 박 전 원내대표에게 부담으로 다가간다. “이해찬 전 총리는 복당 대상,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입당 대상”이라는 강창일 의원의 발언이나 “민주당 간판을 내릴 수 없다”는 일부 의원들의 주장은 사실상 ‘통합 반대’의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박 전 원내대표가 아무리 통합에 뜻이 있어도 이들과 함께 ‘기득권 집착 세력’으로 도매금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다. ‘판 메이커’가 되겠다는 정치인 박지원의 꿈이 최대 시련에 봉착한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