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전자에서 해고된 박종태 씨가 수원사업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11월 16일 오전 11시 경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중앙문에서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한 40대 남자가 ‘정의가 승리한다’는 피켓을 들고 외로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가운데 시위현장 바로 맞은 편에서는 난데없이 ‘음주운전’ 캠페인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1인시위를 벌인 이 남성은 지난해 삼성전자 사내 전산망에 노조를 만들자는 글을 올렸다가 11월에 해고된 것으로 알려진 박종태 전 삼성전자 대리다. 박 씨는 해고 직후 회사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제기하는 동시에 복직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여왔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박 씨가 제조그룹으로 인사 이동한 후 연이어 업무 지시를 불이행함에 따라 해고됐다”며 “노조 결성 시도는 해고 이유와 전혀 무관하다”고 밝힌 바 있다.
기자가 박 씨를 만나러 간 날, 박 씨의 맞은 편에서는 20대로 보이는 직원 10여 명이 ‘음주운전 방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었다. 박 씨는 “퇴근시간도 아닌 대낮에 벌이는 캠페인 의제로는 뜬금없지 않나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며칠 전 중앙문에서 집회하겠다고 신고하자마자 저들이 나타났다. 음주운전을 하지 말자며 평소엔 하지도 않던 캠페인을 하더라. 솔직히 당황스러웠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로변을 사이에 두고 사뭇 이질적으로 보이는 부당해고 시위와 음주운전 캠페인이 동시에 이뤄진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 점심시간을 맞아 삼성전자 직원들이 삼삼오오 중앙문을 향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대다수는 박 씨의 시위를 힐끗 지켜보다가 지나치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이들 가운데 몇몇 사람을 붙잡아 ‘이 시위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보통 잠깐이라도 대답을 해주기 마련인데 붙잡는 직원마다 “전 몰라요” “(인터뷰) 안 할래요”란 말로 기자를 피했다. 잠시라도 박 씨의 시위 무리와 엮이는 것을 꺼려하는 눈치였다.
남부경찰서 정보과 소속 몇몇 관계자들은 수시로 돌아다니며 기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기자는 어렵게 직원 한 사람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거듭 익명을 요구해온 사원 김 아무개 씨는 “박 대리가 용기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시위가 있었지만 (삼성에서) 노조가 설립된 일은 없었지 않느냐”고 되물으며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그냥 자포자기식으로 조직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씨의 시위 현장에는 ‘건전한 회식문화’ ‘음주운전 안하기’ ‘2차 안하기’ 등 다양한 문구의 현수막들이 색색들이 걸려 있었다. 이에 대해 박 씨는 “관할 경찰서가 실수로 집회와 삼성전자 측의 집회 요청을 중복 허가해주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다”며 “저쪽(삼성전자)에서 여러 장의 캠페인 플래카드를 걸어놓다 보니 내 의견을 피력할 만한 공간이 거의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같은 사원이 부당하게 해고돼 시위를 하게 됐는데 현재 회사 측에서 갑자기 벌인 것으로 보이는 이번 캠페인은 내 시위가 사원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시작한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고 추측했다.
박 씨는 3년 전 삼성전자 노사협의회인 한가족협의회 위원에 6표 차로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인생이 180도로 달라졌다고 전했다. 당시 박 씨의 몇몇 동료들에 따르면 박 씨는 협의회 위원 시절에 여사원 임신 처우 개선 등을 제기하며 누구보다도 정말 열심히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열정적인 활동이 회사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다는 게 박 씨의 주장이다. 그는 협의회 근로자위원으로서 열심히 활동하면 사원들의 업무미비사항이 개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튀는’ 위원으로 낙인 찍혀 협의회에서 징계를 당하는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박 씨 측을 담당하고 있는 송명섭 변호사는 “박 씨는 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회사 측으로부터 ‘회사가 너를 안 좋게 보고 있다’ ‘너 같은 협의위원은 처음 본다’ ‘노조 만들 거냐’ 등의 말을 지속적으로 들어오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박 씨에 따르면 결국 그는 협의회 측으로부터 위원 면직 처분을 받게 됐고, 이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 결과 우울증 및 역류성 식도염, 신경성 위염을 앓았고 설상가상으로 목 디스크 판정까지 받아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와중에 박 씨는 회사 측으로부터 2009년 8월, 2010년 7월에 각각 브라질과 러시아 출장 업무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박 씨는 병환으로 인해 해외 출장을 갈 수 없음을 증명하는 진단서를 삼성전자 측에 제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박 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해외 출장을 거부하자 ‘왕따 근무’를 당해야만 했다”고 주장했다. 회사가 의도적으로 박 씨로 하여금 하루 종일 빈 책상을 지키도록 지시함으로써 정신적인 위축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박 씨는 “지각 한 번 없이 23년 청춘을 바친 회사로부터 배신당한 기분,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 측은 “박 씨를 위해 해외출장을 가지 않는 부서를 찾아주려고 직무대기 상 시간이 걸렸을 뿐 왕따 근무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박 씨는 직무대기 과정에서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판단,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이에 지난해 11월 사내 게시판에 노조 관련 글을 올렸으나 15분 만에 삭제당했다. 이후 그는 몇 주 후 징계위 참석 통보를 받았고, 익일 해고됐다.
그는 기자에게 해고 직후 동료 사원들이 보낸 위로 글들을 보여주며 ‘짠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은 잘 지내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인 어린 딸이 빨리 성장한 느낌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딸아이가 아빠 사정을 알더니 피아노 학원은 안 다녀도 괜찮다고 먼저 말하더라.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현재 생계는 박 씨의 부인이 수세미를 팔아 보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 씨는 인터뷰 말미에 “응원해주는 가족들과 우리 동료 사원들을 생각해서 끝까지 삼성전자 노조설립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