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영이 시즌 마지막 대회인 CME그룹 타이틀홀더스에서 우승했다. 그의 LPGA투어 첫 승이다. 로이터/뉴시스 |
# 스윙의 정석
“왜 우승이 없느냐는 얘기를 하도 많이 들어서 나중에는 질문을 받으면 그냥 웃으며 ‘그러게요’라고 짧게 답했어요. 이유를 알면 우승을 했을 텐데 말이죠. 그리고 그걸 격려라고 생각해요.”
박희영의 무관(無冠)이 화제였던 것은 워낙 골프 이력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영외고 시절인 2003년부터 2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2004년 아마추어로 프로대회에서 우승, ‘가볍게’ 한국프로가 됐다. 2005년 최나연을 제치고 신인왕에 올랐고, 2006년에도 2승을 거두며 신지애, 최나연, 지은희 등과 국내 정상을 다퉜다. 2007년 상금 6위를 기록한 후 미LPGA 퀄리파잉(Q)스쿨에 도전, 3위로 풀시드권을 땄다. 지은희가 US오픈을 제패하고, 신지애는 미국지존이 되고, 최나연은 상금왕에 올랐지만 기대만방이었던 박희영은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러 차례의 톱10과 두 차례의 준우승이 있었을 뿐이다.
인상적인 활약은 없었지만 박희영은 미국에서 ‘로켓’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버디 기회가 오면 로켓처럼 추진력을 얻어 몰아치기에 능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미국에서도 박희영의 장타, 컴퓨터 아이언샷을 인정한 것이다.
앞서 박희영은 한국에서는 ‘스윙의 정석’으로 불렸다. 보통 주말골퍼들에게 있어 실전참고용으로는 남자프로보다는 여자프로가 더 도움이 된다. 남자프로들은 워낙에 파워풀한 샷을 날리는 까닭에 이를 흉내내기 어려운 반면, 여자프로들은 그대로 따라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자선수 중에서도 스윙이 가장 완벽하다고 하니, 박희영은 레슨 분야에서 인기가 높았다. 우승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모델골퍼로 유명한 안나 로손, 김인경 등과 미디어를 통해 레슨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박희영 동영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쯤되면 우승을 하지 못하는 선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유독 박희영에게 우승이 없느냐가 화제가 됐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박희영은 “제 스윙에 대한 평가는 너무 과분하죠. 솔직히 성적이 좋을 때는 자부심이었지만 4시즌이 다 지나도록 우승이 없으니까 스윙에 대한 과찬도 부담스러웠습니다”라고 말했다.
어쨌든 박희영이 이번 우승으로 한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명실상부 ‘명품스윙’으로 손색이 없게 됐다.
#‘다중이’의 우승 소감
그런데 박희영은 지인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이 하나 따로 있다. 바로 ‘다중이’다. 각 상황마다 너무도 다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식상한 질문이지만 다시 물었다. 우승소감을.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죠.”
역시 좀 싱거운 모드였다. 그래서 몇 가지 섬세하게 물어보니 숨겨둔 욕심을 조금씩 발산했다.
“4년 만의 첫 우승을 시즌 막판에 하는 건 무슨 일이래요. 로켓이라는 별명처럼 지금처럼 샷 감각이 좋을 때 몇 대회 더 우승을 해야 하는데요. 어쨌든 이제 시작이에요. 내년부터는 일본투어는 안 뛰고, 미국에 전념하면서 한국대회에 가끔 나가려고 해요. 자신이 생겼죠. 가장 우승하고픈 대회는 메이저대회도 있지만 매번 톱10에 들면서도 번번이 우승을 놓친 세이프웨이클래식이에요. 내년엔 못해도 2~3승 해야죠.”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적확’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고, 이번을 계기로 누구 못지 않게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홀로서기
박희영은 2009년부터 홀로서기를 했다. 함께 다니는 로드매니저가 없다. 34세의 여자 캐디 카일리 프랫(호주)이 도와줄 뿐이다. 열 살이 많은 프랫은 5년간 2부투어 생활을 하고, 캐디경력도 좋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일요신문>과 인터뷰하는 날도 올랜도 집 근처에서 프랫과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
미국진출 처음에는 주로 엄마가 따라다녔다. 2006년부터 중학생이던 여동생 박주영이 언니를 따라 골프에 입문하면서 아빠는 한국에 남아 동생을 뒷바라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산가족이 되면서 불편한 게 많아 아빠를 위해 엄마를 한국으로 돌려보낸 것이다. 동생과 통화를 자주하지만 골프에 대해, 특히 기술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얘기하지 않는단다. 현재 박주영도 KLPGA 프로다.
한영외고를 나오고, 미국에서 4년을 보냈지만 영어는 아직 자신이 없다는 박희영.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인데 이번 우승 인터뷰는 준비를 제대로 못해 ‘영어가 더 고생했다’고 한다. 차는 스포츠액티비티차량인 BMW X5를 타고 다닌다.
박희영은 지난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집을 마련했다. 혼자 살기 때문에 하우스가 아닌 콘도를 택했다. 집 근처에 최나연 서희경 박세리 등 한국선수 이웃사촌이 많이 살아 서로 의지가 된다고. 가장 친한 선수는 서희경. 신장, 몸매, 분위기가 비슷해 미국사람들은 자매로 오해하기도 한단다.
12월초 한국에 들어오면 3주간 머물 예정이다. 미국생활하면서 친구들과 소원해져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 줄어든 게 걱정이다. 끝으로 남친? 일단 미국에는 없다. 올랜도는 휴양도시로 할머니 할아버지들 천지라 괜찮은 젊은 남자를 찾기 힘들단다. 한국에는 동창 등이 있지만 남친 만들기는 꿈도 못 꾼다. 이유를 묻자, 박희영이 “투어생활하는데 누가 사귀어줘요?”라고 볼멘소리를 낸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