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A 씨의 총애를 받았던 B 씨는 A 씨의 외장 하드에서 A 씨가 회사 여직원 등을 면봉, 빗과 같은 비상식적인 도구를 사용해 ‘엽기적인’ 방법으로 성폭행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X파일’을 발견한 후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경찰과 회사에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경찰은 “B 대리가 몰카 영상 속 피해자를 찾아 A 지점장을 고발케 하는 등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B 씨는 사건 발생 2개월 만인 2010년 1월 L 기업 측으로부터 ‘회사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유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L 기업 간부 성폭행 사건의 전말과 그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B 씨를 만나 사건 이후 근황을 들어봤다.
B 씨는 L 기업 간부 성폭행 사실을 처음 발견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여러 위험을 감수하고 수사에 협조한 결과는 참혹했다. B 씨는 8년간 몸담았던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받아야 했으며 갖은 루머에 시달리며 우울증도 앓았다. 잘못된 일을 고발하는 데 협조했다가 도리어 억울한 처지에 놓인 B 씨는 인터넷 게시판에 답답한 심정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L 기업이 B 씨를 퇴사시켰다’는 소문이 돌고, B 씨가 더 이상 글을 올리지 않자 많은 네티즌들은 B 씨를 걱정하며 최근까지 그의 근황을 궁금해 했다.
12월 7일 기자와 2년 만에 다시 만난 B 씨는 현재 모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건 당시 충격적인 사건 내용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언론 보도가 적었던 터라 뒤늦게라도 B 씨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는 기자의 간청 끝에 어렵사리 마련된 자리였다. ‘L 기업에서 퇴사하게 된 과정을 말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B 씨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한 인터뷰 도중에도 “그 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많은 정신적 고통을 당했다. 그냥 기사에 내 이야기는 쓰지 말아 달라”며 몇 차례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부하직원 신분으로 상사의 범죄를 고발하는 것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얼마나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를 B 씨의 사례가 방증하는 듯 했다.
L 기업이 첫 직장이었고 8년 동안 애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던 B 씨. 그가 평소 자신을 아껴주던 상사 A 씨의 엽기적인 범죄행위 증거들을 포착했을 때 잠깐 갈등도 했지만 영상 속의 피해 여직원들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B 씨는 “모른 척 지나가는 게 상사에게 신임도 얻고 여러모로 나한테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피해영상을 본다면 그 누구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도와주려고 했을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B 씨에 따르면 그 X파일에는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약 10년간 촬영된 성폭행 몰카 영상들이 연도, 날짜, 장소, 시간, 피해자 성명 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영상분석 결과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A 씨가 몰래 수면제를 탄 음료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상태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밖에도 성폭행을 할 다음 대상을 예고하는 사진 파일을 비롯해 사외, 사내, 해외, 유흥업소, 지하철, 음식점, 길거리 등에서의 몰카 자료들도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당초 B 씨는 경찰에 X파일만 넘기고 끝내려고 했으나 형사들의 협조 부탁에 마음이 흔들렸다고 한다. 또한 B 씨는 “A 씨가 또 다시 여직원을 대상으로 범행을 계획하려는 것을 포착한 후 마음에 급해졌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얼른 예전 피해자들을 찾아 설득해서 고발 조치를 하는 게 필요했다”고 말했다. 때문에 B 씨는 회사 일이 끝난 후 저녁부터 새벽까지 사비를 들여가며 피해자들을 찾아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형사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새벽까지 ‘일’을 하느라 귀가 시간이 늦어지자 B 씨 부인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B 씨는 “부인이 괜한 걱정을 할까봐 ‘회식이 있다’는 말로 안심시키고 새벽마다 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했는데 나중에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는 이해하면서도 많이 속상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기자가 ‘피해 여직원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냐’고 묻자 B 씨는 “다 퇴사했다. 지금은 서로 연락도 안한다. 고발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답했다. B 씨에 따르면 피해자들 대부분은 약혼자가 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때문에 성폭행 관련 고발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해야 했는데 A 씨의 부모와 변호사 측이 피해자들의 회사까지 찾아와 ‘합의’를 부탁하면서 큰 피해를 봤다고 한다. 성폭행 피해 사실이 회사와 가족들에게 ‘커밍아웃’된 피해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서둘러 합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B 씨 역시 권고사직을 당하는 피해를 봤다. B 씨는 A 씨가 경찰에 끌려가자마자 사내 게시판에 A 씨를 고발하는 익명의 글을 올렸는데 상부 측에서 수소문 끝에 B 씨를 찾아냈다고 한다. B 씨는 “회사에 글을 올린 건 아직도 후회한다. 회사 측에만 이야기 안했으면 피해자들도 어느 정도 보호가 됐을 것이고, 나도 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당시에는 A 씨가 빨리 퇴사를 당해야 더 이상의 피해 여직원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회사를 믿고 고발 글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L 기업 측이 진상확인 후 A 씨를 당장 퇴사시킬 것이라는 B 씨의 예상과는 달리 L 기업 측은 B 씨가 일하는 지점에 몇몇 임원진들을 총출동시켜 ‘글 올린 사람이 누구냐’며 일일이 면담한 끝에 기어코 B 씨를 찾아냈다고 한다. 이어 B 씨에게 “피해자가 누군지 말하라. 회사 이미지 타격이 크다. 빨리 A 씨와 합의를 보게 하라”고 압박했다고 B 씨는 주장했다.
수사가 진행되고 실랑이 끝에 결국 A 씨는 L 기업 측으로부터 파면 조치를 당했으나 B 씨에게도 후폭풍이 닥쳤다. A 씨의 후임 지점장으로부터 권고사직을 제의받은 B 씨가 ‘윗분 생각인가요’라고 묻자 후임자는 ‘그렇다’고 답을 했다고 한다. 사건 발생 두 달여 만 이었다.
B 씨는 아직도 그 사건을 떠올리면 얼굴이 어두워진다. 무엇보다 B 씨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믿었던 몇몇 주변 동료들이다. 처음에는 B 씨의 용기 있는 행동에 동료들도 격려를 보내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렇게 피해자들을 돕는 것을 보니 합의금을 5 대 5로 나누기로 입 맞춘 것 같다’ ‘피해 여성들과 불륜 관계라서 돕는 거다’ 등등 갖은 루머가 나왔다고 한다.
B 씨는 인터뷰 도중에 “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소문을 만들어내서 나를 비방했을까요”라며 기자에게 되물으며 허탈해했다. B 씨는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빛 1 억 원, 1995년 출시된 차종 한 대 등 그 때의 재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소문과는 달리 B 씨는 사건협조 과정에서 어떤 이득도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평범한 가장, 평범한 아빠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다는 B 씨. 하지만 그는 밤잠을 설치며 사건을 돕느라 신종플루에 걸려 고생해야만 했고, 2주 있으면 돌잔치를 하는 딸도 B 씨로부터 신종플루를 옮아 세상을 뜰 뻔한 일도 있었다. B 씨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데 나도 가족도 큰 상처를 입었다”며 “하도 사람들에게 데여서 앞으로는 어려운 사람을 봐도 그냥 지나칠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기자가 B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그와 가끔 업무상 만난다는 한 영업점 직원이 말을 건넸다. 그 직원은 “B 팀장님 만나러 오셨나 봐요. 정말 좋은 분이세요. 항상 어려울 때마다 하나라도 도와주시려고 하세요”라며 입이 닳도록 칭찬을 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지난해 1월 서울중앙지법은 동료 여직원 등에게 약을 타 먹이고 나체를 촬영한 혐의로 기소된 L 기업 지점장 A 씨에게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 씨가 법정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반성했으며 피해자들과 합의한 점, 교육공무원에 오래 종사한 부모의 다짐 등을 참작했다”며 양형에 대해 설명했다. 제보자 B 씨는 “A 씨의 부모가 양쪽 다 교육감에 준하는 고위 공무원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몇몇 네티즌들은 “부모가 교육 공무원인 게 범죄 사실과 무슨 연관이 있어 참작이 되느냐”며 “성폭행과 관련한 솜방망이 처벌은 당장 중단돼야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사건을 담당한 서울관악경찰서는 A 씨를 성폭행 등의 혐의로 구속할 당시 확인된 성폭행 피해자는 10명 이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A 씨의 X파일 증거 및 성폭행이 친고죄인 것을 감안할 때 100여 명에 달하는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