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삼 의원. 당시 방첩대 소속 대위로서 작전을 진두지휘 했다. |
최근 출간된 <가위주먹>은 당시 사건을 실화화한 소설이다. 소설을 쓴 구광렬 울산대학교 교수(55)는 올 초 우연히 관련 기사를 접하고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그는 “3공화국 비사로서 오랫동안 묻혀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 기록물로서 남겨놓고 싶었다”고 출간 이유를 밝혔다. 그런 만큼 소설은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구 씨의 소설과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1967년 가을에 은밀히 이뤄졌던 북침 작전 사건을 재구성해 봤다.
1967년은 북한 무장공비들의 남침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 해 3월 북한 김일성 주석은 조선노동당 회의에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는 데 총역량을 집중해 무장공비를 전후방으로 침투시켜 민심을 교란하라”는 지령을 전군에 하달했다. 이후 북한의 남침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나 무장공비는 휴전선 인근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됐을 정도였다. 공비들은 강원도 휴전선 인근 GP(경계초소)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번번이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북한으로 돌아가곤 했다.
당시 방첩대 소속 609특공대장 이진삼 대위(현 자유선진당 국회의원)는 북한의 도발을 잠재우기 위해 우리 쪽에서도 응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상관이었던 윤필용(준장) 방첩부대장은 그를 만류했다. 너무 위험한 도발이며 설령 살아 돌아온다 해도 세상에 알릴 수 없는 비밀스런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는 상관을 설득할 한 가지 묘수로 북한군 포로 가운데 특수 훈련을 받은 자들을 작전에 투입시킬 것을 건의했다.
“공비였는데 뒤돌아서 쏘고 북으로 달아나면 어떡하려고 하느냐”고 윤 준장이 만류하자 이 대위는 “시쳇말로 죽더라도 우리 대원들이 죽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며 맞섰다. 결국 그는 상부로부터 작전을 승인받는다.
이후 이 대위는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을 인물 찾기에 고심했다. 선택된 자들은 총 4명으로 서빙고동 수용소에서 생활 중이던 전향 공비들이었다. 이들은 남한에 들어와 지하당 조직, 데모 선동과 같은 간첩 활동을 하다 붙잡힌 자들이다.
이 대위는 3개월 가까이 그들을 지휘하며 때로는 카리스마로 또 때로는 동네 형처럼 포근하게 포섭에 나섰다. 물론 우이동 골짜기 야간 침투 훈련이나 군견초소 통과와 같은 고된 훈련도 병행했다. 훈련이 끝나면 술집과 요정에 데려가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주말이면 명동에 나가 남한 영화를 보여줬다. 또 작전에 성공하면 남한 정착을 돕고 “장가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해방군이 되어 북으로 돌아간다 해도 패잔병 취급을 받거나 수용소로 끌려갈 것이 뻔한 전향 공비들은 전적으로 이 대위를 신뢰하게 됐다.
1967년 9월 27일 1차 작전이 개시됐다. 이 대위 외 3명은 2대2로 조를 편성해 황해도 개풍군 금성천을 넘어 811 GP 인근까지 침투했다. 무거운 군장을 이끌고 1㎞ 넘게 포복 전진하고 24시간을 꼬박 방공호에 숨어 소변도 누운 채 봐야 했다. 결국 이들은 인근에서 지뢰를 매설하고 있던 북한군 13여 명을 사살하고 무사 귀환했다. 2차 작전은 2주 뒤인 10월 14일 개시됐다. 목표는 1차 작전 때 수행하지 못했던 휴전선 인근 46사단장 숙청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 작전과 같은 루트로 북침을 시도했으나 잠복 중이던 정찰군과 마주치는 바람에 도로 내려와야 했다.
10월 18일 대망의 3차 작전은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루트를 변경했다. 1, 2차 작전으로 강원도 지역의 경계가 강화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대위가 이끈 팀은 임진강으로 도하한 뒤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북한군 689 GP 지점을 완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적군 20여 명을 사살하고 50점의 장비를 파괴시켰지만 아쉽게도 우리 쪽 전향 공비 한 명도 전사하고 만다.
이 대위가 이끈 응징보복작전은 1967년 9월부터 10월까지 총 3회에 걸쳐 이뤄졌으며 이 과정에서 북한군 33명을 사살했다. 이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북침 작전이었다. 40년이 지나 관련 문서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우리 군의 북침이 실제 했다는 사실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전쟁 이후 우리 군이 휴전선을 넘어 적군을 사살한 예가 알려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응분의 보복 이후 북한의 도발이 주춤해졌다는 긍정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반면 더 큰 도발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특히 우리 쪽 보복이 있은 지 석 달 후 일어난 1·21사태(1968년 1월 21일 무장한 북한군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던 사건)는 사실상 우리 쪽에서 계기를 제공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강원도나 서해가 아닌 서울 쪽으로 곧바로 침투한 예도 드물었기에 이 같은 의견이 나온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1967년 북침과 이듬해 1·21사태 이후 남북 간이 급격한 화해무드가 조성되면서 남북접십자회담을 개최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이 대위는 3차례에 걸친 북침 이후 계속적인 응징보복을 주장했지만 전두환·노태우 중령의 적극적인 만류와 박정희 대통령의 “그만두라”는 명령이 있어 남한의 북침 활동은 더 진전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설 중에는 북침을 앞둔 한 전향 공비가 “동무는 총 들고 북으로 올라가멘(면) 쉬(쉽게) 방아쇠가 당겨딜 것 같애?”라고 묻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념과 냉전의 시대, 적과 동지 할 것 없이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전향 공비들의 이야기를 담은 <가위주먹>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등장인물 이름까지 실명”
▲올해 2월 우연히 사건과 관련한 일간지 기사를 접하게 됐다.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워 친근한 소설 형식을 빌려 쓰게 된 것이다.
―내용은 어느 정도 실화에 기초했나.
▲두 전향 공비와 삼각관계를 형성하는 여주인공만 가공의 인물이고 나머지는 거의 실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작전에 참여한 전향 공비 이름 역시 성만 바뀐 채 실명으로 썼다.
―작전에 참가했던 전향 공비들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있나.
▲그 분들의 소재는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 실존해 있다면 국정원의 감시하에 잘 살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사실 우리 현대사의 영웅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나. 실존 인물에 대한 흠결은 독자의 판단이다.
―소설을 쓰며 작전을 지휘한 이진삼 의원을 수차례 인터뷰했다고 들었다.
▲원래는 평생 묻고 갈 생각이었지만 천안함 사태 이후 우리 군의 안일한 대응 태도에 분노해 이 같은 사실을 공개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부인이 작고할 때까지도 북침 사실을 일절 알리지 않았다고 들었다.
―소설 제목인 <가위주먹>의 의미는.
▲‘가위바위보’의 북한어다. 항상 승패로 나뉘는 남북 상황을 암시한다고 볼 수도 있고, 작은 의사결정 하나도 가위바위보로 정할 수밖에 없는 북한 공비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의미가 내포돼 있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