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10월10일 열린 조선노동당창건 60주년 기념식. |
혹자는 김 위원장 사망을 두고 축복받은 독재자의 말로였다고 말한다. 형장에서 삶을 마감한 후세인이나 하수구에서 살해당한 카다피 등 다른 독재자들과는 사뭇 다른 평온한 최후를 맞았기 때문이다. 과연 김 위원장은 누구도 넘보지 못한 권좌에서 평탄한 삶을 이어왔던 희대의 독재자였을까. 김 위원장은 국제무대에서도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역사상 최악의 아사 사태를 몰고 온 악명 높은 세습독재자로 알려졌을 뿐, 인간 김정일에 대한 조명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삶에서도 눈물이 있고 상처가 있고 난관이 있었다. <일요신문>은 <김정일리포트> <다큐멘터리 김정일> <김정일 대해부>등 다수의 관련 저서를 통해 김정일을 연구한 바 있는 경기개발연구원 통일·동북아연구센터 손광주 선임연구위원과 만나 독재자 모습 뒤에 숨겨진 인간 김정일의 면모를 자세히 파헤쳐봤다.
▲ 김정일에 대한 다수의 저서가 있는 손광주 연구위원. |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7세 때의 일이다. 생모 김정숙이 1949년, 난산으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할 때 빈자리가 생긴 것이다. 생모의 죽음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김정일 전문가로 알려진 경기개발연구원 통일·동북아연구센터 손광주 선임연구위원은 “생모의 죽음이 김정일에게 큰 충격을 줬다. 혹자는 김정일이 이 당시 유아급성우울증을 겪었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정확치는 않다. 이후 계모 김성애가 김정일을 키웠다. 하지만 김정일은 생모를 잊지 못했다. 김성애에게는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말했다.
김정일의 심한 여성편력은 이러한 트라우마와도 관계 깊다. 그의 첫 여인 성혜림은 김정일보다 5세 연상이었지만 그녀에게 모성애를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그는 고등학교 시절 관저 여자들에게 손대기 시작한 것부터 고영희 등 정식부인을 포함해 수많은 여인들을 품에 안으며 결핍된 애정을 달랬다. 말로만 전해 내려오는 ‘김정일 별장 섹스파티’는 난잡하기로 유명하다.
▲ 서해 갑문 건설사업을 현지 시찰한 김정일 위원장과 김일성 주석 모습. |
손 위원은 “김정일은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계모 김성애가 자신을 김평일과 차별한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김정일의 가족사진 한 장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김일성 생일 때 찍은 사진 같았다. 사진에는 김성애, 김평일 등 김일성 일가가 등장한다. 그런데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김정일은 멀리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당시 김정일의 마음상태를 엿볼 수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아버지에 대한 충성과 효심은 극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의 첫 여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 씨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김정일의 효심을 자세히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김정일은 매일 아침 아버지가 있는 주석궁에 전화를 걸어 심기를 살폈으며 항상 친밀하게 대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손 위원은 이에 대해 “인간으로서 순수한 효심도 있었겠지만 후계자로서 ‘관리’의 측면도 강했다.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에도 김정일은 김일성 측근들을 불러 직접 지시사항을 내려 아버지를 관리했다”라며 정치적 의도도 있었을 것으로 풀이했다.
아버지를 이어 권력을 잇고자 하는 김정일의 권력욕은 무척이나 강했다. 권좌에 오르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사들을 죽였다. 심지어 자신의 친족에게까지 칼날을 겨눴다. 1974년 정무원 부총리까지 올랐던 삼촌 김영주는 1975년 세습체제를 꾀했던 조카 김정일에 의해 시골로 쫓겨난다. 여맹위원장까지 지낸 계모 김성애는 물론 이복동생 김평일 역시 김정일의 견제를 피하지 못한다. 물론 그 광기 어린 권력욕 뒤에는 두려움도 컸다.
손 위원은 “김정일은 항상 권력찬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친족에게까지 그렇게 했겠나. 삼촌 김영주는 조카 김정일의 노골적인 견제로 ‘식물성 신경부조화’라는 희귀병까지 걸려 1993년 당에 복귀하기까지 비참한 세월을 살다갔다”라고 지적했다.
김정일은 평소 사람 다루는 기술이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람관리에 있어서 매우 치밀했다. 그 핵심은 ‘소수정예’와 ‘비밀파티’로 축약된다. 손 위원은 “김정일이 직접 관리하는 대상은 딱 수뇌부 250명이다. 한 사람이 관리할 수 있는 최적의 숫자다. 250명은 모두 개별적으로 관리된다. 보통 ‘비밀파티’라고 불리는 연회를 매주 열어 인사들 각각을 소환해 극진히 대접하고 직접 관리한다. 그래서 이 파티에 속하지 못한 간부들은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것이 아닌지 두려워하기까지 한다. 매우 계획적이고 치밀한 계산이다”라고 설명했다.
▲ 김경희 노동당 부장(왼쪽에서 두번째)이 김 위원장의 함주군 동봉협동농장 현지지도에 동행해 함께 찍은 기념사진. |
어린 시절 모친과의 생이별, 계모의 견제 그리고 언제나 그리웠던 부정(父情). 그는 권좌의 자리에서 두려움으로 항상 고뇌했다. 광기 어린 독재자 얼굴 뒤에는 분명 눈물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면모만으로 그가 북한주민과 사회에 남긴 어두운 과오를 덮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지만 그가 벌인 수많은 테러와 납치, 그리고 도발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내조 여왕’보다 ‘끼’에 필 꽂혔다
▲ 김정일과 김옥. |
김정일의 첫 번째 부인은 동갑내기인 홍일천으로 두 사람은 정부호위총국 지도원으로 있을 당시 연애를 시작했다. 홍일천은 김일성종합대학 러시아문학부 출신 재원으로 러시아에서 출생한 김정일과 코드가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1966년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는 딸 김혜경이 있다. 홍일천은 김정일이 만난 유일무이한 인텔리였다고 할 수 있다. 북한 소식통에 의하면 젊은 시절 성격이 괴팍했던 김정일은 자주 홍일천을 업신여기며 손찌검을 하고 다른 여성들과 바람을 피우는 일을 예사로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일천은 김정일과 3년을 살고 헤어졌는데 이혼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돼 정무원 보통교육부 부부장(우리로 치면 교과부 차관)을 거쳐 지금은 김형직사범대학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두 번째 부인은 김정남의 어머니이기도 한 성혜림(1937년생)이다. 둘은 정식 혼인이 아닌 혼외동거 관계였지만 북에서는 김정일의 첫 번째 여인으로 평가받는다. 경남 창녕 출생인 성혜림은 다섯 살 연하인 김정일과 만날 당시 유부녀였고, 평양 예술단 소속의 북한 최고 여배우로 활동했다. 성혜림의 남편인 리평의 친동생은 김정일과 같은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한 동창이었다. 결과적으로 김정일은 형수를 뺏은 셈이 된다. 김정일은 아버지 몰래 동거를 시작했고 1971년 김정남을 낳았다. 하지만 김일성은 죽을 때까지 성혜림을 아들의 본처로 인정하지 않았다. 200평대 관저를 세워 그녀를 본처로 대우했던 김정일이지만 아버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후 평양과 모스크바를 오가며 기나긴 망명생활을 이어오던 성혜림은 200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정일의 세 번째 부인이자 김일성이 공식 본처로 내정한 여인은 조선노동당 간부의 딸 김영숙(1947년생)이었다. 두 사람은 1974년 결혼해 두 딸(김설송, 김춘송)을 낳았다. 김영숙은 김일성이 인정한 공식 본처였지만 둘 사이에 관해 알려진 스토리는 별로 없다. 김영숙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조선노동당 타자수로 일했다는 것과 김철만 장군의 소개로 김정일을 만나게 됐다는 것 정도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김일성은 혁명가의 딸이며 순종적 여인상을 지닌 김영숙과 자신의 아들이 이어지길 바랐던 눈치지만 김정일의 성에는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현재 김영숙은 권력과 등진 채 북한 호위사령부 초대소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영희가 죽자 그 자리를 단번에 꿰찬 여인은 바로 김옥(1964년생)이다. 김정일 생애 마지막 부인이 된 김옥은 아이러니하게도 고영희가 자신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김정일에게 추천한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김정일은 아내가 정한 보모와 사랑에 빠진 셈이다.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김옥은 왕재산경음악단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중 김정일의 개인 비서로 발탁됐다.
김옥의 경우 다른 네 명의 여인과 달리 김정일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공식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또 김정일에게 반말을 퍼붓고 거리낌 없이 신경질을 부리는 유일무이한 인물로 알려져 호사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천하의 독재자도 22세 연하의 젊은 여인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짝사랑 여인’ 윤혜영 누구권력으로도 가질 수 없었다
김정일은 생전에 영화배우, 가수, 무용수 등 주로 외모가 출중하고 끼 많은 여성 스타일을 선호했다. 일단 눈에 띄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유부녀일 경우 남편을 외국으로 보내버리기도 하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띠동갑이 넘는 여인들에게 구애의 신호를 보냈다.
그런가하면 노동당 간부와의 관계를 들먹거리는 여성은 총살시켜버리는 포악함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독재자도 가질 수 없었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북한 ‘보천보전자악단’ 소속 가수인 윤혜영이다.
탈북 시인인 장진성은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라는 서사시를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고발했다. 이 책에 의하면 김정일은 자신의 생일날 윤혜영과 함께 집단체조 공연을 관람하거나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럽에 사람을 보내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는 등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윤혜영은 김정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미 같은 악단의 피아니스트인 김성진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관계는 노동당 도청으로 탄로나 윤혜영은 김성진과 함께 투신자살을 기도했다. 윤혜영의 자살 기도 소식을 전해들은 김정일은 격노해 “무조건 살려낸 다음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책에는 윤혜영이 결국 처형당한 것으로 묘사됐지만 실제로는 생존해 가수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진다. 김정일은 갔지만 그가 남긴 여성편력은 후대에도 계속 회자될 것으로 보인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