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이터/뉴시스 |
특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생전에 4조~5조 원 규모의 해외비자금을 조성해 놓고 조직을 관리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막 권력을 이어받은 어린 후계자 김정은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의 경우 부족한 조직 장악력을 만회하기 위해 이러한 ‘통치자금’은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포스트 김정일 시대에 천문학적인 규모로 추산되는 해외비자금의 행방이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김 위원장이 갖고 있던 ‘곳간의 열쇠’는 후계자 김 부위원장에게 무사히 전달된 것일까.
지난 2011년 12월 28일과 2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결식과 추도대회가 거행됐다. 본격적인 김정은 시대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김정은 부위원장이 과연 어떤 지도력을 보여줄지 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갈리고 있다. 하지만 경험부족과 어린 나이 탓에 조직 장악력 면에서 부친을 완벽히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고모부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등 주변 후견인들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빈약한 김 부위원장의 경험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지난 11월 3일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북한 공군 제378부대를 시찰하는 모습. 연합뉴스 |
한·미 정보당국은 김 위원장이 생전에 구축해 놓은 해외비자금 규모는 대략 4조~5조 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보당국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비자금도 상당수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그 이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은닉된 비자금은 스위스, 룩셈부르크, 버진 아일랜드 등지에 비밀계좌 형태로 분산 운영되고 있다.
외부에 알려진 대로 김 위원장의 비자금을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부서는 노동당 39호실이다. 39호실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부서로 운영되고 있지만 사실상 김 위원장에 의해 직속 운영되어 온 막강한 독립기관이다. 당과 내각 등 다른 경제 관련 부서보다 큰 힘을 갖고 있으며 세계의 금기부서로 꼽힐 만큼 모든 것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종의 ‘성역’으로 남아있다. 미국 등 서방세계에 의해 그 간부들과 기관 자체는 제재 대상으로 낙인 찍혀 있다.
미국은 지난 2005년 김 위원장 비자금의 ‘돈세탁’ 거점으로 의심되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하고 대성은행 등 북한 금융기관을 제재하는 등 상당한 경제 제재를 가해 ‘자금줄 압박’을 꾀하고 있다. 북한 역시 이러한 제재안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가지 대응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대내외적인 정황을 감안하면 김 위원장은 생전에 후계자 김 부위원장에게 해외비자금 운영 권한을 이미 넘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가장 큰 단서는 이철 전 스위스 주재 북한대사가 지난 2010년 3월께 갑작스레 북한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국내의 대북매체 열린북한방송은 지난 2010년 7월 이 같은 소식을 전하면서 ‘비자금 인수인계설’을 보도한 바 있다. 이후 이 전 대사가 실제 북에 들어온 것이 확인되면서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이 전 대사는 지난 30년 간 해외생활을 전전하면서 39호실과 직통라인을 두고 김 위원장의 해외비자금을 직접 관리해 온 인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그가 돌연 귀국한 지난 2010년 3월을 기점으로 비자금 인수인계가 본격화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물론 당시 이 전 대사가 귀국한 이유 중에는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와 관련하여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비자금 인수인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당시 단순한 ‘곳간 열쇠’ 전달뿐 아니라 비자금 운영을 위한 비밀스러운 ‘노하우’도 함께 전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 김정남 |
익히 알려진 대로 김 부위원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청부살인설’까지 나돌 정도로 형 김정남을 경계하고 있는 상황이다. 자신의 향후 권력판도를 둘러싸고 하나의 제거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외부에서는 김 부위원장의 견제세력으로서 김정남의 힘은 ‘돈 줄’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은닉한 비자금을 두고 형제간의 ‘쩐의 전쟁’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정남의 비자금 보유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시나리오다.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이윤걸 대표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김 부위원장에 의해 새롭게 등장할 신세력은 자금을 댈 능력이 있는 인재일 것이다”고 예견했다. 이는 곧 김정은 체제에는 ‘쩐’이 곧 권력이 된다는 얘기가 된다. 그만큼 세계 곳곳에 은닉되어 있는 김 위원장 비자금 인수인계와 그 활용방안은 북한 미래와도 직결된 사안이라고 볼 수 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비번’ 아는 오른팔과 왼팔
이 전 대사는 비밀스러운 책무 탓에 이름도 여러 가지다. 본명이 임철이라는 얘기도 있고 이수용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김 위원장의 인민학교 시절부터 50년 넘게 최측근에서 함께해온 분신 같은 존재다. 자금줄에 관해서는 실세 중 실세로 통한다. 그에게 자금줄을 맡겼다는 것은 그만큼 김 위원장 생전에 그를 매우 신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전 대사는 김 위원장의 차남 김정철과 김 부위원장이 스위스 국제학교에서 공부하던 시절, 김 위원장을 대신해 학부모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 위원장의 자금줄은 물론 두 자녀를 스위스 현지서 보살피며 교육까지 책임졌던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전 대사는 지난 2010년 3월께 대사직에서 물러나 북한으로 급작스레 귀국했다. 당시 우리 당국과 많은 북한전문가들이 그의 귀국소식에 주목했다. 그의 귀국소식과 함께 본격적인 비자금 인수인계가 시작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는 오랜 세월 서방세계에서 자금을 관리해 온 만큼 국제경제관계에 정통하다. 지난 2010년 귀국한 뒤에는 당대표자회의를 통해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올랐으며 2011년 1월부터 북한 ‘합영투자위원회’ 위원장직에 올라 업무를 수행 중이다. 합영투자위원회는 4명의 부위원장과 14개 국을 둔 방대한 조직으로 알려졌으며 2010년 말에는 중국 상무부와 ‘황금평개발사업’을 성사시켰다. 김정은 시대에도 ‘노련한 자금관리 노하우’와 ‘국제 경제감각’ 등으로 인해 여러모로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 대사와 함께 김 위원장의 자금관리책으로 꼽혀온 인물은 전일춘 노동당 39호실 실장(국가개발은행 이사장 겸직)이다. 일명 김정일의 ‘금고지기’로 통한다. 그는 지난 2010년부터 39호실의 수장을 맡고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39호실은 김 위원장 이외에 어떤 통제도 받지 않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김 위원장의 당 통치자금 전반을 관리하며 대성은행, 고려은행 등 주요 금융기관과 알짜배기 외화벌이 기업소들을 직접 운영한다. 그 외에도 ‘슈퍼노트(위조지폐)’ ‘마약거래’ 등 불법적인 자금조성에도 관여하고 있다.
전 실장은 지난 2010년 북한 국방위원회가 직접 설립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대풍국제투자그룹’의 이사 명단에도 올라와 있다. 김 위원장의 자금관리와 외화벌이 사업에 가장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인사로 평가된다. 지난해 12월 15일 김 위원장의 마지막 현장지도로 기록된 ‘광복지구상업중심 현지지도’에서 김 위원장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공식석상 보좌는 39호실이라는 비밀부서의 수장으로서 이례적인 행보였다. 그만큼 김 위원장과 가깝다는 얘기가 된다. 현재 유럽연합은 전 실장을 북한 고위층 제재대상 명단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북한 마피아식 자금조성 실태
마약·짝퉁·위폐로 ‘외화벌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북한 당국의 마약거래다. 북한에서 생산하는 마약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필로폰과 헤로인이다. 보통 ‘빙두’ ‘얼음’으로 불리며 39호실이 직접 생산과 암거래에 관여한다. 북한의 필로폰은 타 지역 상품들과 비교해 품질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1호’라 불리는 고순도 필로폰은 세계 최상급으로 통한다. 주로 함경도, 양강도 등 조중접경 지역에서 재배되며 일반 인민들도 쉽게 접할 만큼 북한에서 마약은 꽤나 흔한 상품이다. 매년 4000만 달러 규모가 해외에서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위조지폐 생산 역시 북한의 주된 외화벌이 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10년 8월께 필립 크롤리 당시 미 국무부 차관보는 공식석상에서 “북한이 외화벌이 수단으로 달러 위조 활동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힐난한 바 있다. 지난 2010년 2월에는 중국 옌지의 한 기업을 통해 스위스에서 달러 위조용 잉크와 종이를 수입했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지기도 했다.
북한이 위조지폐 생산에 손을 댄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90년대부터는 초정밀 위조달러(슈퍼노트)를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력을 끌어올렸다. 북한의 위조지폐는 ‘926호 공장’이라고 불리는 평성상표인쇄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중앙은행 산하기관이지만 보위부와 보안성 인사들이 직접 개입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생산량을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매년 1500만 달러 이상의 슈퍼노트가 생산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북한 당국은 통치자금 조성의 일환으로 필터담배와 비아그라 등 을 위조해 내다 팔고 있다. 당국이 ‘짝퉁생산’에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그 기술력만큼은 세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지난 2009년 스웨덴 세관은 북한의 위조담배 1만여 갑을 적발하고 밀반입을 시도한 외교관 2명을 체포하기도 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