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대전 서구 청소년수련관에서 열린 민주통합당 당대표 및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합동연설회에 참석한 후보들이 손을 잡고 필승을 다짐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부겸, 박지원, 문성근, 박영선, 박용진, 이강래, 이인영, 이학영, 한명숙 후보.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이런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듯 후보들이 쏟아내는 메시지는 이전의 제주, 부산에서보다 한결 강렬했다. 공천 혁신, 세대 교체 등 인적 쇄신과 관련된 메시지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분출됐다. 사실상 맏상제를 맡아 고 김근태 상임고문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이인영 후보는 “김대중, 노무현의 이름을 파는 ‘유훈 정치’를 극복하고 혁명적 공천 개혁을 해야 한다”며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가 말한 ‘시대의 흐름’은 진보였다. 진보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당내 인사들에 대한 인적 쇄신을 주장한 것이다. 이 후보는 또 “인지도 높고 지역에서 유명하다고 공천되는 지나간 정치의 종말을 고해야 한다”며 ‘호남 물갈이’ 필요성도 강조했다.
문성근 이학영 박용진 후보 등 시민통합당 출신의 후보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저지 실패, 론스타 국정조사 무산 등을 겨냥, 원내지도부의 무기력한 대응을 비판하면서 “정치 혁신과 공천 혁명으로 위대한 시민정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의 주장 역시 진보 정체성 강화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김부겸 후보는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 당내 대선주자들은 서울 강남권에, 다선 의원들은 한나라당 텃밭에 출마할 것을 촉구한다”며 대선주자 및 중진의원들을 겨냥해 ‘적지 차출론’을 꺼내들었다.
‘호남 물갈이론’과 ‘대선주자 및 중진의원 적지 차출론’, ‘진보 정체성 강화론’ 등 갈래는 여러 가지이지만 결국 4·11 총선 승리를 위해 인적 쇄신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의 적극적 지원을 받아야 할 당권주자들이 한목소리로 ‘표 떨어지는 소리’를 하는 데에는 최근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한나라당 쇄신에 대한 민주당 내 위기감이 반영돼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이명박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 사건, 물가고와 사회 양극화 등으로 여권에 대한 민심이반이 극심해지는 바람에 민주당 내에 ‘총선 낙관론’이 만연해 있었지만, 이제는 정반대로 ‘총선 위기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선거 경험이 많은 민주당 인사들은 최근의 여야 상황을 바라보며 “민주당이 헛물만 켜는 것 아니냐”며 위기감을 토로하고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한나라당이 비대위 출범 이후 일부 비대위원들의 튀는 언행과 인적 쇄신 논란, 당 정체성 재정립 논란 등으로 극심한 갈등에 휩싸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나라당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매일매일 각 신문의 머릿기사와 방송의 메인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데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나라당 비대위원으로 영입된 27세의 이준석 씨를 다룬 기사가 민주당 당권주자 9명을 다룬 기사보다 몇 배는 더 많다”며 “‘똥볼’을 차더라도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 곳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민주당은 어느 선수도 공을 차지 않아 중단된 축구 경기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내에선 새 지도부 출범과 동시에 공천심사위원회를 꾸리고, 이 공심위에 강력한 ‘컷 오프’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 호남권 원외 인사는 “고령의 다선의원들에게 아무리 대승적 결단을 촉구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면서 “국민참여경선 외에 뾰족한 공천 방법이 없다면 공심위가 1차로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3선, 4선이 되도록 존재감 없는 호남권 다선의원들, 정치자금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고도 다시 정치 재개를 노리는 중진급 전직 의원들, 전국의 호남향우회를 틀어쥐고 조직 관리만 해 온 지역 토호세력들을 1차로 걸러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서울지역의 한 의원은 “2010년 6·2 지방선거 때 ‘미완의 실험’에 그쳤던 시민배심원제를 다시 한번 시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른바 ‘슈퍼스타 K’ 방식으로 불리는 시민배심원제를 도입할 경우 후보들의 인지도나 경력보다는 정체성, 미래 비전 등이 중시되는 공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의원은 “수적으로 많아야 20명 안팎에 불과하고 지도부와 대선주자들의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공심위보다는 시민배심원단을 꾸리는 게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민주당의 약속과도 부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거론되고 있지만 결국 관건은 새롭게 들어설 민주당 지도부의 인적 쇄신 의지가 현역 의원과 지역위원장 등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돌파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30년 넘게 민주당에서 일했던 한 전직 의원은 “역대 총선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로 평가받는 공천은 1996년 15대 총선”이라며 “민주당이 당시의 절박함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5년 통합민주당을 깨고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야권 분열의 책임을 희석시키고 1997년 대통령선거 준비를 위해 그야말로 사심 없는 공천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5대 총선이 등용문이 된 민주당 인사들로는 정동영 정세균 천정배 추미애 의원과 고 김근태 상임고문, 김민석, 방용석 전 의원 등이 있다. 대부분 당의 중심 기둥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라는 역사적 과제 앞에서 민주당이 과거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공헌 언론인
명예회복형…새로운 모색형…쇄신은 없고 회귀만
지난 1월 5일 오후 국회 기자실인 ‘정론관’에 낯선 얼굴의 인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4ㆍ11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민주통합당(민주당) 소속 예비후보 8명이었다. 각각 서울 동대문갑, 중랑을, 강서을, 송파병 선거구에 출마할 예정이라는 이들은 ‘민주통합당 중진의원들은 적지로 출마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읽어 나갔다.
이들은 “한나라당에서 8명의 중진의원들이 불출마를 선언했고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대대적 인적 쇄신을 예고하고 있는 마당에 우리 민주당은 현실은 어떠하냐”며 “반 이명박 심판 정서로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인적 쇄신은 오간 데 없고 기득권 지키기에 연연하는 모습”이라고 일갈했다. 이들은 “3선, 4선이 되도록 당의 혜택을 입은 전ㆍ현직 중진의원들이 안락한 요지를 찾아 출마선언을 하고, 당선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도둑 출마’를 감행하려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동대문갑 출마가 유력시되는 천정배 의원(4선), 중랑을 출마를 선언한 김덕규 전 의원(5선), 강서을 출마를 선언한 김효석 의원(3선), 송파병 출마를 선언한 정균환 전 의원(4선) 등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날 성명은 다분히 이해당사자의 호소에 가까웠지만 총선을 앞둔 민주당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현역 중진의원들의 몸사리기뿐 아니라 고령ㆍ다선의 ‘올드 보이’들까지 대거 출마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이번 총선을 통해 정계복귀를 노리는 ‘노정객’들은 적지 않다. 서울에는 중랑갑의 이상수(65ㆍ3선), 중랑을의 김덕규(71ㆍ5선), 관악갑의 한광옥(70ㆍ4선), 송파병의 정균환(68ㆍ4선), 강동갑의 이부영 전 의원(69ㆍ3선)이 있다. 정대철 전 의원(67ㆍ5선)의 서울 출마설도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당의 텃밭인 전남에는 담양ㆍ곡성ㆍ구례의 국창근(73ㆍ초선), 장흥ㆍ강진ㆍ영암의 유인학(72ㆍ초선) 전 의원이 있다. 민주당 소속은 아니지만 최재승(66ㆍ3선ㆍ전북 익산을ㆍ무소속), 한화갑 전 의원(72ㆍ4선ㆍ전남 무안ㆍ신안ㆍ평화민주당)등 동교동계 출신들도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당내에서 이들의 출마를 반기지 않는 이유는 단지 이들이 고령이거나 다선의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흘러간 옛 노래를 연상시키는 이들의 출마 명분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내에선 “당과 정치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개인적인 명예회복을 위해, 또는 국회의장이나 부의장 등 명예직을 맡기 위해 출마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정계를 떠나 있던 이상수 한광옥 이부영 정대철 전 의원 등이 대표적인 ‘명예회복형’으로 분류된다. 2004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반대하고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으로의 재합당 과정에도 동참하지 않았던 최재승 한화갑 전 의원은 이번 총선을 통해 사실상 정치를 재개하려는 ‘새로운 모색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던 김덕규 전 의원에 대해서는 “국회의장에 욕심이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들과 달리 장영달 전 의원(63ㆍ4선)은 자신의 오랜 지역구인 전북 전주완산을 벗어나 한나라당 텃밭인 경남 의령ㆍ함안ㆍ합천 출마를 선언, ‘올드보이의 귀환’이라는 눈총에서 벗어나 있다. [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