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청부협박 혐의를 받고 있는 김태촌 전 범서방파 보스를 서울대병원 입원실에서 만났다. 그는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는 주홍글씨의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한동안 잠잠했던 김 씨가 또다시 뉴스메이커로 등장하자 국민들은 ‘그럼 그렇지…’라며 고개를 내젓고 있다. 수차례 구속과 출소를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눈물겨운 개과천선을 공표했던 왕년의 주먹들이 지저분한 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을 ‘지겹도록’ 봐왔던 탓이다. 이쯤되면 조폭 담당 검사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말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하지만 현재 입원 중인 김 씨는 혐의를 비롯해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각종 의구심 섞인 시선들에 대해 항변을 하고 있다. 기자는 지난 1월 10일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는 김 씨를 직접 만나봤다. 김 씨와의 인터뷰는 사실 확인 및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서울대 병원 관계자가 동석한 자리에서 이뤄졌다.
‘보스’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루종일 한 끼도 못 먹었다는 김 씨는 생각보다 수척해보였다. 면도도 안한 얼굴에 시커먼 낯빛으로 기자를 맞은 그는 연신 기침을 해댔다. 1970~80년대를 주름잡던 국내 최대 폭력조직 보스의 카리스마는 여전했지만 예전의 카랑카랑한 혈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는 매끼 10여 종류에 달하는 각종 약들을 털어 넣으며 측근들의 부축을 받으며 거동해야 하는 환자에 불과했다.
대화는 대구 기업가 협박사건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됐다. 청부 협박 혐의에 대해 김 씨는 “절대 사실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김 씨가 청부협박 혐의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거액의 돈을 받아내기 위한 과정에서 김 씨가 한 씨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김 씨는 “대화도중 ‘야, 이 ××야’라고 한 적은 있다. 하지만 협박이라니…. 협박의 기준이 무엇인가. 어느 한 부분만을 콕 집어서 판단하는 건 위험하다. 경찰이 녹취록도 갖고 있다니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협박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욕설 부분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일반 사람이 대화중 가벼운 욕을 하거나 ‘당신 왜 그랬어?’라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나 같은 사람이 그러면 졸지에 협박으로 몰리는 거다. 같은 말도 내가 하면 다르게 받아들여지는게 현실이다. 더구나 내 말에 상대가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고 주장한다면 일이 더 커질 것 아니겠나. 이런 것들이 내가 과거 폭력조직 보스였다는 것 때문에 감수해야 할 ‘주홍글씨’이자 족쇄다. 일례로 내가 예전에 배우 권상우 씨를 협박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죄판결을 받지 않았나”라며 열변을 토했다.
▲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나는 1989년에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그후 고통이 너무 심해 의사들의 심각한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몸속에 통증완화 기계를 삽입했다. 마약성 진통제인 몰핀도 듣지 않는 상태였는데 조금이라도 통증을 줄여보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 기계가 1년 전부터 자주 오작동을 하고 멈추는 일이 반복됐다. 고생을 거듭하다 지난해 11월 말에 안되겠다 싶어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수술부위가 부어오르고 피가 고여 터지는 게 아닌가. 개인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12월 10일에는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복용 중인 심장약을 끊고 재수술을 하자는 의사의 의견에 따라 12월 12일 병원에 입원했고 나흘 후 재수술을 받았다. 재입원 및 재수술 시기가 공교롭게도 대구사건 보도시점과 겹친 것일 뿐 소환을 피해 입원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아픈 사람을 이렇게 매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나. 입원 직후부터 혜화경찰서 수사과장과 계장을 비롯해 형사들 여럿이 신병보호 명목으로 찾아와 수시로 동향을 살펴보고 있다.”
의혹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김 씨는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하며 왼쪽 옆구리의 수술자국을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또 동석한 병원관계자에게 자신의 얘기가 사실인지를 되묻거나 측근에게 자신의 입원 및 수술기록 등에 대한 정확한 날짜를 물어오게 해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김 씨는 ‘최양석’이라는 가명으로 입원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VIP병동에는 고위급 환자들이 다수 입원해 있다. 애초 나는 실명으로 입원했지만 수간호사가 ‘취재진이 몰려들 경우 다른 환자들이 프라이버시를 침해받을 수 있고,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으니 가명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권유해 그에 따른 것뿐이다. 비밀리에 입원할 이유가 없다. 이는 병원 측의 행정법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들었다”고 해명했다.
김 씨는 몸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경찰조사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어차피 법정에서 진실이 밝혀져야 할 사안인 만큼 피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는 “조사 시기는 내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의사 허락이 떨어져야 되고, 의사와 경찰 간에 얘기가 되어야 된다. 얼마 전 변호사를 통해 서울대병원에서 발급한 진단서를 경찰에 제출했다. ‘2월 22일까지 안정가료를 요한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 한 달 정도는 입원생활을 더 해야 할 것 같다. 의사 허락이 떨어지면 나는 조사에 성실히 임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김 씨는 “모든 것은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내가 떳떳하다 해도 법정이 나를 유죄로 판단한다면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법의 심판에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 혐의가 인정되기 전에는 함부로 몰아세우지 말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김 씨는 여전히 ‘보스’의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억울하게 사건에 휘말린 것일까. 김 씨를 향한 세간의 시선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연예인·기획사·기업총수…아이돌 아버지까지 인사한다고 찾아와
김태촌 씨는 육체적인 고통 외에도 적잖은 심적 고통을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2년여간 일절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칩거생활을 계속해왔던 그로서는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기도 전에 피의사실이 공표된 것이 무척이나 괴로워보였다.
“진주에 내려가서 정말 조용히 지냈어요. 사업 좀 해보려고 몇 번 중국을 오가긴 했지만 잘 안돼서 접었습니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니 항간에서 ‘그 나이 먹고 정신 못차린다’고 욕할까 속이 많이 상합니다.”
김 씨는 병실로 찾아오는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을 듣고 틈틈이 찬송테이프를 듣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고 했다.
이날 기자는 김 씨의 측근으로부터 그가 대구 사건에 연루된 과정 등에 대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김 씨를 지켜봐온 측근 김기봉 씨는 “대구에 있는 후배들이 자꾸 ‘형님, 출소하신 지도 좀 됐는데 대구에 한번 내려오시라’고 연락을 해왔다. 구설에 오를까 김 씨는 계속 거절했는데 아우들의 성화에 못이겨 대구에 내려갔다. 식사 자리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건’에 대해 듣게 됐고 당사자와 얘기나 해보자고 만났다가 엮인 것이다”고 주장했다.
김 씨는 김태촌 씨가 ‘과거 보스 전력’ 때문에 말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김 씨가 사실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비밀리에 중요한 일을 추진 중이었는데 안타깝다. 부산교도소 출소 후 김 씨는 ‘곰두리봉사회’라는 단체를 통해 장애인 일자리를 양성하고 자활을 돕는 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사정기관의 감시도 있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까봐 조용히 진행하고 있었던 거다. 부인도 불우한 사람들을 상대로 오랫동안 급식봉사를 묵묵히 하고 있지 않나. 문제는 김 씨가 조용히 지내려 해도 사람들이 가만두지를 않는다는 거다. 그러니까 자꾸 불미스러운 일에 엮인다. 연예인들과 기획사 관계자들, 기업총수, 심지어 아이돌그룹 아버지까지 인사드리겠다고 자꾸 찾아오는데 어쩌겠는가. 김 씨로서는 난감한 일 아니겠나”라며 안타까움을 대신 전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