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통합당 손학규 고문이 지난 1월 28일 지지자들과 함께 광주 무등산을 등반했다. 연합뉴스 |
사실 손학규 고문은 뭐라도 하지 않고선 존재감을 보여줄 수 없는 처지까지 밀려났다. 지난해 4·27 재·보궐선거에서 사지인 경기 성남 분당을에 출마, 당당히 당선되면서 야권 대선후보 지지도 1위로 뛰어올랐지만 이는 벌써 잊힌 지 오래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등장에 휘청거리더니 최근엔 안 원장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각축전을 지켜봐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적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고 표현하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손 고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는 야권의 대권 경쟁이 안 원장과 문 이사장의 투톱 대결로 비쳐지는 것에 대해 측근들에게 “굉장히 아픈 부분이다. 지지율이 1~2%대였을 때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손 고문의 마지막 승부수는 뭘까. 당 안팎에선 한명숙 대표, 문성근 최고위원의 부상을 계기로 민주당이 친노(친노무현)그룹 대 비노그룹의 대결 구도로 재편된 게 손 고문에게 기회가 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다른 한편에선 그가 야권통합 국면에서 완전히 등을 돌렸던 박지원 최고위원과 화해함으로써 다시 한 번 호남세력과의 밀월관계를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이에 대해 그의 한 측근은 “손학규는 그렇게 정치하는 사람이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온갖 그럴듯한 정치 공학적 셈법이 있지만 그걸로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은 손 고문이 더 잘 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손 고문은 무등산에서 “호남은 민주당의 뿌리이자 가장 중요한 지지 기반”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호남 일부 인사가 통합에 반대했지만 그것은 민주당과 호남을 죽이는 일이었다”며 반통합 노선을 걸었던 일부 호남 정치인들과 선을 그었다.
손 고문의 측근들은 “손학규의 향후 행보가 궁금하다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라”고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손학규의 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국민의 부름을 기다리는 진인사대천명의 길이다. 지난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 패배, 2008년 총선 참패 후 강원도 춘천에 틀어박혀 2년 동안 ‘참회의 시간’을 가졌던 것, 그러면서도 각종 재·보선이 있을 때마다 현장을 누비며 지원했던 것, 2010년 8월 전당대회 때 당원들의 요구에 따라 출마해 대표에 당선됐던 것, 지난해 4·27 재·보선 때 분당을에 출마했던 것, 이후 온갖 비난을 감수하며 야권통합을 밀어붙인 것…. 이 모든 게 향후 ‘손학규의 길’과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당장 손 고문의 관심은 4·11 총선 승리에 꽂힐 수밖에 없다. 총선에서 야권이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려면 총 111개의 선거구가 몰린 수도권에서 최소 70석은 확보해야 한다. PK(부산·경남) 총선이 ‘문재인의 선거’라면 수도권 총선은 경기지사 출신인 ‘손학규의 총선’이기도 하다. 민주당의 당면 과제인 의회권력 교체를 위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손 고문은 수도권 압승에 몸을 던져야 할 상황이다. 그의 측근들도 “2월 말부터 수도권 격전지를 돌며 본격적인 선거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전했다.
총선 승리를 위한 헌신 못지않게 손 고문에게 절박한 것은 대권 수업이다. 안철수 원장은 ‘미래형 지도자’, 문재인 이사장은 ‘믿음직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한 것과 달리 손 고문은 확실한 색깔이 없다는 지적이 줄곧 제기돼 왔다. 정치에 관한 한 문외한인 안 원장, 신출내기인 문 이사장과 차별화되는 ‘검증되고 준비된 지도자’의 이미지를 국민들 머릿속에 분명히 각인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손 고문은 당분간 자신이 제시한 ‘3통합(사회통합 남북통합 정치통합) 구상’을 정책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에 상당한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도 작업에 들어갔다고 한다. 손 고문은 특히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경제 민주화’의 해법을 담은 책을 펴내기 위해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중 경제론>처럼 그의 책도 ‘○○○ 경제론’이라는 타이틀을 달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이미 그는 자신의 고민 일단을 내비친 바 있다. 무등산 등반 당시 그는 트위터에 “‘차별이 없다’는 무등(無等)의 뜻을 생각하며 산에 올랐다”고 글을 올렸다. 또 설 연휴 기간 동안 인기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를 VOD로 한꺼번에 봤다면서 “세종은 특권을 유지하려는 사대부들의 폭력 등 온갖 저지를 뚫고 백성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특권층이 짓누르는 사회가 아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사회통합이 중요하다’는 손 고문의 평소 생각과 상통하는 얘기다.
이 같은 손 고문의 ‘진인사’에 ‘천명’이 뒤따를지에 대해선 양론이 맞선다. 우상호 전 의원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살아온 길로 보나 정치적 경험으로 보나 손학규만큼 진보와 복지라는 2012년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야당 지도자는 없다”고 말했다. 이인영 최고위원도 다른 자리에서 “손학규가 없었다면 야권통합도 없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손 고문이 재평가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손 고문은 안철수 원장이 정치 참여를 포기하거나 문재인 이사장이 PK 총선에서 참담한 성적을 받는 식의 외생변수가 있어야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평가절하 했다.
어떤 전망이 맞을지를 판단할 1차 시험대는 4·11 총선이다. 손 고문으로선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의 승리뿐 아니라 자신의 승리도 챙겨야 하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