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대통령후보 단일화 서 명식 후 손을 잡고 웃고 있다. | ||
향후 정치는 JP가, 국정운영은 DJ가 각각 나눠맡는 방안이었다. 바로 JP가 합당의 핵심조건으로 내건 사안이었다. 90년 3당 합당 때 민자당 대표를 맡았으나 ‘토사구팽’ 당한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DJ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냉기를 느낀 한 총장은 합당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JP는 그해 12월 DJ에게 ‘합당 불가’를 통보하게 된다. 이후에도 곡절은 많았지만 DJP공조체제는 사실상 이때 종결됐다고 봐야 한다.
2000년 4월 총선 승리를 위해 합당에 목을 매고 있던 DJ가 JP의 총재직 요구를 끝내 거부한 것을 둘러싼 분석은 여러 가지다. JP가 내건 50 대 50의 지분 및 이원집정부제 개헌 등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들이었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반면에 JP의 ‘수구 정치인’ 이미지가 결정타였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당시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김 대통령에게 ‘JP가 신당의 총재가 되면 아무리 참신한 인재들을 영입해도 수도권에서 선거를 이길 수 없다’는 보고가 많이 올라갔다. DJ가 ‘JP 총재안’을 비토한 중요한 근거가 됐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5·16쿠데타 이후 40여 년간 권력을 향유했다는 부정적인 JP 이미지가 합당의 최종 걸림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DJ정권 전반 2년간 총리를 지냈던 JP에 대한 관료사회의 평가는 괜찮은 편이다. 총리실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이렇게 평했다.
“강력한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는 얼굴마담 이상이 되기 힘들다. 특히 대다수의 명망가 총리들은 장관들에게 휘둘렸다. 총리실 직원들이 인정해주는 총리는 3명 정도다. 김종필, 이회창, 이수성씨 등이다. 이수성씨는 특유의 친화력을 지녔고, 이회창씨는 강력한 장악력을 가졌다. JP는 장악력과 경륜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제로 정권 초에 JP가 총리로 들어오면서 총리실의 위상은 대폭 강화됐다. 거쳐가는 자리 정도로 여겨졌던 국무조정실장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초기의 정해주 국무조정실장은 차관급회의에서 실질적으로 정책조율을 담당했고 DJ가 주재하는 청와대 경제대책조정회의에도 참석했다. 당초에는 국무조정실장이 회의 멤버에서 제외돼 있었으나 JP가 DJ에게 강력하게 요청해 투입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청와대 소속이던 진념 기획예산위원장은 국무회의석상에서 정 실장에게 예산조정을 의뢰하기도 했다. 공무원 봉급 삭감으로 만들어진 1조2천억원의 실업대책예산 중 8천5백억원의 예비비 집행 내역을 국무조정실이 책임지고 ‘조율’해달라는 것이었다. 노동부 등 각 부처들이 쏟아내는 실업대책 예산배당 요구를 선별하는 칼자루를 안겨줬던 셈이다.
당시 총리실에서는 “실세 총리하에서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1급이던 총리 공보수석이 차관급으로 격상됐다. 청와대 공보수석과 총리실 공보수석의 직급이 같아진 것이다.
▲ DJP 공조파기 후 총리직 잔류를 결정한 이한동 총리(왼쪽). 이는 이 총리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 ||
DJP단일화 때만 해도 DJ가 정권을 잡고 나면 JP는 과거처럼 ‘토사구팽’될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었다. 하지만 DJ는 정권 초에 JP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표현했다.
김중권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훗날 “김 대통령은 세간의 관측과는 달리 DJP정권을 반드시 유지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공동정권을 함께 창출했다는 점에 대해 감사함과 신뢰가 대단했다. 집권 초기에 일부 국민회의 인사들이 대통령을 면담하며 ‘몇% 안 되는 지분을 가진 자민련이 전횡한다’는 식으로 불만을 토로하면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두 번 다시 그런 얘기를 꺼내지 말라. 내가 대통령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공동정권체제를 유지하겠다’는 게 김 대통령의 일관된 주장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JP 본인은 타고난 ‘2인자’였다. 분수를 넘지 않았고 DJ를 반드시 위에 두었다. 초기에 자민련 박태준 총재는 청와대 회동시 DJ와 배석자 없이 독대했던 반면 JP가 DJ를 면담할 때는 김중권 비서실장이 배석했다.
김 실장의 배석은 JP가 원했다는 후문이다. 자신이 DJ 밑의 총리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 셈이다. DJ, JP가 16대 총선 연합공천 등 민감한 정치현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면서 삐거덕거리던 2000년에 접어들면서 김 실장은 배석을 중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사석에서 JP의 ‘2인자 처세술’에 대해 혀를 내두르면서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YS가 취임 초에 금융실명제 실시를 전격 발표했다. 당시 YS는 청와대로 국회의장이었던 나, 민자당 대표인 JP 등을 불렀다. 금융실명제 도입 사실과 취지를 설명해주기 위해서였다. YS를 기다리면서 내가 갑작스러운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JP도 맞장구를 쳐줬다. 그런데 YS가 들어오자 JP는 일어서서 인사를 하면서 ‘각하, 용단을 내리셨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 순간 역시 JP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JP는 최고권력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실리’는 확실히 챙겼다. 자민련 몫 각료를 정부 주요부처에 심었고 산하기관 인사도 자민련 출신을 각별하게 배려했다. 때문에 국민회의쪽에서는 “고생은 우리가 하고 재미는 JP가 본다”는 불만이 적지 않게 흘러나왔다.
현 노무현 정권은 출범한 지 1백일이 훨씬 넘었지만 산하기관 인사를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자리를 챙겨야 하고 또 그 자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아직 파악중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JP는 어떤 자리가 노른자위이고 자민련 인사를 심기에 적당한지를 훤하게 꿰고 있었다.
한 언론사 기자는 2001년 중반에 3·26개각 때 입각한 자민련 출신 정우택 해양수산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청탁을 한 적이 있다. 공무원인 친척어른이 ‘보잘 것 없는’ 산하기관장 연임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아, 그 자리는 JP가 두 달 전에 이미 당쪽 사람으로 내정해서 지시를 해왔다. 내가 맘대로 못한다”고 대답했다. 일반인들은 존재여부도 모를 정도로 한직에 가까운 산하기관장 인사까지 오래 전에 챙겨둔 것이다.
DJP공조가 파기되던 2001년 하반기에 재직중이던 자민련 몫 공기업 장들만 해도 10명이 넘을 정도였다. 이태섭 원자력문화재단 이사장, 정해주 진주산업대 총장, 이정무 한국체육대 총장, 허노중 한국증권전산 사장, 권해옥 주택공사 사장, 최상용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 구천서 한국산업인력공단 사장, 김풍삼 사학연금관리공단 상무 등은 모두 자민련 의원, 지구당위원장, 전문위원 출신이었다.
▲ 2001년 JP의 내각제 포기에 반대해 자민련 탈당 후 한나 라당에 입당한 김용환(오른쪽) 강창희 의원. | ||
5% 안팎의 지지율만으로는 ‘정치 보스’로서의 존립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요인이 중첩돼 몰락을 부채질했다. DJ나 YS와는 달리 충성심 강한 ‘가신그룹’이 없었다는 게 최대 약점이었다.
정치적 위기 상황이 도래하면 JP의 측근들은 오히려 등을 돌리곤 했다. 99년 7월 JP가 DJP 단일화 합의사항인 ‘연내 내각제 개헌’을 포기하자 먼저 강력한 포문을 연 것은 김용환 자민련 수석부총재였다. 김 부총재는 후보 단일화의 실무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JP의 ‘복심’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JP가 내각제 포기선언을 했던 7월12일 밤 김 부총재는 구 공화당 출신인 강창희 원내총무와 함께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찾아갔다. JP를 면담한 두 사람은 핏대를 올리면서 JP를 비난했다. 이에 흥분한 JP가 수차례 고성을 지르는 게 방밖으로 들릴 정도였다. 결국 김 부총재는 탈당해 한국신당을 창당하고 강 총무는 탈당한 후 한동안 무소속으로 지내다가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문제는 JP의 내각제 포기가 ‘실리’를 따진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측근이었던 두 사람은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결별’을 선택했다는 대목이다. 당시 내각제 개헌에 대해 국민여론의 지지가 낮았을 뿐만 아니라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이 ‘강력 반대’ 입장이었다. DJP가 연내개헌을 합의한다 해도 실천이 불가능했다.
자민련 핵심 인사는 “JP는 연내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국민회의와의 합당을 통해 16대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는 것을 선결과제로 삼았다. 총재직을 합당 조건으로 요구한 것도 다수당이 된 후 개헌을 주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하지만 두 기둥인 김용환, 강창희 의원이 등을 돌리고 흔듦으로써 JP의 정치적 효용은 급격하게 위축됐다.
그들이 JP구상을 지원했다면 DJ가 ‘JP총재’ 카드를 더 적극적으로 검토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충청권의 차기 맹주를 노렸다. 그래서 연내 개헌 포기를 계기로 JP를 코너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2001년 9월 이한동 총리가 DJP공조파기를 선언하면서 자민련 복귀를 요구한 JP와 DJ 사이에서 총리직 잔류 결정을 내리는 과정도 ‘JP측근’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다. 이 총리는 당시 “김 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숙고 끝에 그 뜻에 따르는 게 도리라고 판단했다”고 밝혔으나 진상은 다르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당시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이 총리 잔류 파문’이 지난 뒤 “DJ가 이 총리에게 잔류를 간곡하게 요청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기실은 이 총리가 잔류 의사를 수차례 전달해왔다. JP와의 관계 및 후반기 국정운영 쇄신 등을 감안해 이 총리를 교체하려는 게 DJ의 의중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JP 스타일도 문제였다. ‘변치 않는 측근 그룹’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변하면 적응했다. ‘흐르는 물과 같은 정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7월16일 김 부총재가 당직사퇴서를 내자 설득을 위한 노력을 다하지 않고 자민련 지도체제를 바꿔버린다.
충청권 실세그룹이 떠나자 박태준 총재의 힘이 강화되고 그동안 찬밥 신세였던 박철언, 한영수 전 의원 등이 신주류로 부상한다. 박 전 의원은 DJ와 JP의 합당논의를 중개하는 메신저 역할까지 맡게 된다. 김 부총재가 맡아야 했을 역할을 박 전 의원이 대신하게 된 것.
공천 스타일도 자민련 내부의 불만 대상이었다. 한국정치 현실상 전국구 중 일부는 ‘공천헌금’을 받고 재력가를 기용하고 일부는 고생한 당료 출신을 안배하게 된다. DJ나 YS는 전국구 공천에서 이 같은 원칙을 나름대로 지켰다.
반면에 JP는 전국구 당선권 내에 대부분 재력가를 배치한다는 인상을 줬다. 이 같은 고참 당료들의 불만이 JP의 당 장악력을 떨어뜨리는 또 다른 요소로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JP가 ‘구 정치인의 전형’인지 아니면 ‘경륜의 정치가’인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그러나 그가 각박한 정치판에서 풍류와 해학의 멋을 즐겼던 정치인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JP가 부인 박영옥씨와 함께 97년 예산 보궐선거 지원유세를 할 때 기자들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러브호텔’ 이야기가 나왔다. JP는 불쑥 “러브호텔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곁에 있던 부인 박씨가 “ 러브호텔도 모르느냐”면서 설명했다. 묵묵히 듣고 있던 JP는 “아니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러브호텔을 잘 알지. 많이 가봤나 보군”이라고 반응했다. 기자들은 박장대소하고 박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