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
#장남은 왜 소송 제기했나
이맹희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 824만 761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보통주 10주, 우선주 10주)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 100주를 청구했다.
지난 2002년 2월부터 현재까지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가 지급받은 이익배당금 중 1억 원과 지연손해금도 함께 청구했다. 또 이후 청구취지 및 청구원인을 변경할 예정이라고 밝혀 청구액이 더 늘어날 것임을 암시했다. 금액만으로도 수천억 원에 달한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장을 보면 어마어마한 금액의 청구소송이 제기된 발단은 오히려 이건희 회장 쪽에서 먼저 제공한 셈이었다. 2011년 6월 이건희 회장 측은 (주)CJ 재경팀 상무에게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이라는 문서를 전달했다. ‘실명주식과 차명주식을 포함해 이병철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이 상속인들에게 모두 분할 완료했으니 차명재산을 국세청에 신고한 후 실명 전환하는 시점에서 다른 상속인들이 자신의 상속지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취지의 문서였다. 이 문서에 이맹희 전 회장 측이 동의해달라는 것.
이맹희 전 회장은 이때 비로소 차명주식과 관련해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건희 회장 측 요구를 수용할 수 없으며 당연히 상속재산을 청구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삼성 측은 문서에 명기한 바와 같이 이미 상속재산에 대한 분할과 결정이 끝난 상태여서 더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건희 회장 측은 이맹희 전 회장 측에 ‘차명재산에 대한 공동상속인들의 권리 존부’라는 문서를 또 보냈다. 이 문서에는 ‘공동상속인들 사이의 상속재산 분할협의는 반드시 문서로 할 필요가 없다’고 적혀 있다. 또 공동상속인들의 유류분반환청구권의 시효가 소멸했다는 점,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어떤 권리에 대해 법률상으로 정해진 존속기간, 소멸시효와 비슷한 개념)이 지났음을 주장했다. 이건희 회장이 적법한 절차로 상속재산분할을 받았지만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시효가 소멸됐으니 이건희 회장의 소유권에는 변함없다고 강조했다.
문서의 행간을 뜯어보면 이건희 회장 측은 다른 상속인들이 혹시나 제기할지 모를 청구소송을 미리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첫 번째 문서보다 두 번째 문서가 이맹희 전 회장을 자극했을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해 상속재산에 대해 소송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에 발끈했다는 것.
그렇다면 이건희 회장 측이 이맹희 전 회장 측에 전달했다는 두 건의 문서가 다른 상속인들, 즉 이인희 한솔제지 고문, 구자학 아워홈 회장 부인 이숙희 씨,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 이병철 선대회장의 딸들에게도 전달됐을까. 이맹희 전 회장이 제기한 소장에는 이들의 상속분도 명기돼 있다. 따라서 이건희 회장 측이 선대회장의 차명재산을 실명 전환하는 시점에서 이들에게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동의를 구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와 관련, 수개월 전 삼성 주변에서는 흥미로운 소문이 나돌았다. 이병철 선대회장의 차녀 이숙희 씨가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 청구소송을 냈다는 것. 당시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삼성특검으로 밝혀진 이병철 회장의 차명재산에 대해 이숙희 씨가 상속재산이라며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청구소송을 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번에 이맹희 전 회장이 제기한 소송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안이었다. 당시 삼성그룹 측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한 바 있다. 아워홈 측 역시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이 알려진 지금, 당시 이숙희 씨가 실제로 이건희 회장 측에서 받은 문서를 보고 상속재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를 청구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얘기를 단순한 ‘뜬소문’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됐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 준비가 와전됐을 수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이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형제들과 먼저 교감을 나눴으며 형제들이 암묵적으로 동조해 이 전 회장이 총대를 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솔그룹이나 신세계그룹은 모두 “그런 일 전혀 없다”며 부인했다.
이맹희 전 회장이 제기한 소장에는 이건희 회장 측이 보내왔다는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이라는 문서를 인용한 후 “원고를 비롯한 다른 상속인들은 차명재산에 대하여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라고 명시돼 있다. ‘원고를 비롯한 다른 상속인들은’이라는 부분에서 이맹희 전 회장을 제외한 다른 상속인들도 이 문서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이 전 회장과 다른 상속인들이 교감을 나눴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다른 상속인들’, 즉 한솔과 신세계 측은 이건희 회장 측이 보냈다는 문서를 받았는지에 대해 “대주주 개인사와 관련된 문제는 확인하기 힘들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이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지만 CJ 측은 “이맹희 회장이 개인적으로 추진한 것일 뿐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맹희 vs 이건희 진실게임
소장만 보면 일단 이맹희 전 회장을 비롯한 다른 상속인들은 상속재산에 대해 협의하기는커녕 상속재산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으며 문서를 보고서야 비로소 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측이 보냈다는 문서를 보면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은 상속 당시에 모든 재산분할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한쪽은 재산분할이 이미 끝났으니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서명을 요구했고 다른 한쪽은 처음 듣는 소리니 몰랐던 상속재산을 돌려달라며 맞선 것이다.
현재는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건희 회장 쪽은 협의된 것으로 알고 있기에 문서를 보냈을 테고 이맹희 전 회장은 금시초문이기에 청구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법무법인 화우에 따르면 이맹희 전 회장이 끝까지 밀고 나가 승소할 것이라는 뜻을 완강히 피력하고 있는 것으로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소송을 제기한 지 3일 만에 인지대 22억여 원을 납부하며 소송에 돌입했다. 적정선에서 합의하거나 소송을 취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화우 측은 이후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 담당변호사들과도 통화할 수 없다”면서 “언론에 그런 얘기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퍼져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이맹희 전 회장의 소송대리인인 법무법인 화우는 변호사 수 185명에 이르는 국내 5대 로펌(대한변협, 2011년 7월 31일 기준)이다. 이번 소송에 법무법인 화우는 김남근 김대휘 등 모두 14명의 변호사를 배치했다. 이에 대응하는 삼성 법무팀의 명성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만약 재판으로 이어질 경우 삼성이 국내 최고의 로펌과 손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관측도 있어 둘의 승부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재계에서는 재판으로 가지 않고 결국 형제간에 합의할 것으로 보는 의견이 적지 않다. 삼성이나 CJ나 현재 형제간 화해를 이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J 측은 “중재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CJ그룹 관계자는 “그렇지만 결정권자는 그분(이맹희 전 회장)”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삼성 측은 처음과 달리 다소 거리를 두는 모양새다. 삼성 관계자는 “이미 법률적으로 끝난 사안이기에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공을 CJ로 넘겼다.
이번 소송의 핵심 포인트는 소멸시효 3년이 지났느냐의 여부다.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차명재산의 존재를 안 것이 ‘동의서’를 요청받은 때 즉 2011년 6월이므로 시효가 다 경과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건희 회장이 차명주식을 실명 전환한 것은 2008년 10월이기 때문이다. 이맹희 전 회장 측의 주장대로라면 이 전 회장은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 소식을 몰랐을 수도 있다. 국민적인 관심사를 이맹희 전 회장만 몰랐다는 사실을 법원이 과연 어떻게 판단할지도 이번 소송의 또다른 관전 포인트다.
▲ 우린 한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이 2010년 2월 5일 호암 100주기 기념식에서 동생 이명희 신세계 회장(오른쪽)과 얼굴을 부비고 있다. 왼쪽은 이 회장 부인 홍라희 씨. 사진공동취재단 |
재계 관계자는 “이인희 고문과 이숙희 씨는 물론 이명희 회장 역시 아들인 정용진 부회장을 위해 뭔가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이맹희 전 회장이 제기한 소장에 따르면 이인희 고문과 이숙희 씨, 이명희 회장의 상속분은 189분의 13이다. 이맹희 전 회장(189분의 48)이나 이건희 회장(189분의 34)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병철 선대회장 타계 시에는 옛 민법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명희 회장의 경우 이병철 선대회장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고 신세계백화점 등을 받은 마당에 새삼 상속지분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신세계 관계자는 “삼성과 별다른 일도 없으며 현재까지 소송에 대한 것을 고려치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이명희 회장보다 주목받는 사람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차녀 이숙희 씨다. 앞서 언급했듯 이건희 회장의 누나들인 이들이 이맹희 전 회장보다 먼저 법률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인희 고문이나 이명희 회장은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삼성의 문제가 1~2년 쌓인 것도 아닌데 굳이 이미지를 훼손하면서까지 수십 년 전 사안을 놓고 서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라며 “더욱이 형제들 대부분 대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이어서 서로 간의 치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마당에 굳이 법정다툼을 벌일지 의문”이라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한솔그룹과 신세계그룹은 현재까지 소송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솔그룹 관계자는 “이인희 고문께서는 상속 문제에 관한 한 이미 1987년에 정리된 일이라는 입장”이라며 “무엇보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장녀)으로서 집안의 화합을 위해 애써야 하며 동생들이 상속재산을 놓고 싸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견해”라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이 고문께서 이번 사안에 대해 이건희 회장에게 더 우호적이라고 판단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이인희 고문이 소송에 대해 법률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에 정면으로 반박함과 동시에 이건희 회장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막내인 이명희 회장 측도 소송 참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신세계 관계자는 “현재 소송을 검토하고 있지 않으며 향후 별다른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누구보다 관심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차녀 이숙희 씨다. 수개월 전에 먼저 같은 사안으로 소송을 냈다는 소문이 돌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워홈 관계자는 “삼성 소송 건과 관련해 특이사항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수개월 전 소문에 대해서는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며 선을 그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