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맹희 전 회장, 이건희 회장
이렇게 시작되는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최후진술을 담은 편지는 동생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가졌던 감정에 대한 소회와 화해의 뜻을 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화해의 메시지 속에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승계 정통성에 대한 문제제기와 자신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소홀함 등을 드러내며 오히려 공세를 취하는 모습을 띠었다.
이에 삼성그룹에서는 이맹희 전 회장의 편지 내용에 대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 실제 편지 내용 중 일부는 이맹희 전 회장 자신이 직접 써 1993년 출간한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회상록>과도 배치됐다.
이맹희 전 회장은 편지에서 “아버지(이병철 선대회장)는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고…”라며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 승계 정통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운명 전에 아버지는 인희 누나, 누이동생 명희, 동생 건희 그리고 내 아들 재현이 등 다섯 명을 모아두고 그 자리에서 구두로 유언을 하고, 건희에게 정식으로 삼성의 경영권을 물려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다시 유언을 한 것은 1976년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삼성의 차기 대권을 건희에게 물려준다고 밝혔던 추인에 불가했다”라고 적고 있다.
다음으로 편지에서 이맹희 전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건희가 한밤중에 찾아와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할 테니 조금만 비켜 있어 달라고 하면서 조카들과 형수는 본인이 잘 챙기겠다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밝혔다. 이맹희 전 회장이 한국을 떠나 외국을 전전한 것이 본의의 의사가 아니고 이건희 회장의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묻어둔 이야기>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외국으로 떠났다. 내가 길을 떠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동생 건희가 총수가 된 마당에 그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 조금이라도 건희가 나를 부담스러워하면 그것이 바로 삼성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외국에서 영원히 살면서 귀국하지 않을 생각을 했었다. 그동안의 떠돌이 생활이 아버지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번 길은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었다”고 썼다.
지난해 2월 1일 이맹희 전 회장 측 소송 대리인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삼성가 유산소송 판결 선고 후 법정을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이러한 이건희 회장 측의 반박에 대해 CJ그룹 측은 “편지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묻어둔 이야기>를 쓴 1993년과 현재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며 이맹희 전 회장을 옹호했다. CJ그룹 관계자는 “<묻어둔 이야기> 출간 당시에는 이건희 회장에 대해 기대감을 갖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좋은 면을 부각시켜 기술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이건희 회장에 대해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포장을 하지 않고 강하게 표현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재계에서는 이번 편지 내용의 이해관계와 진위 여부를 떠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삼성 CJ와 관련 없는 재계 고위 관계자는 “편지가 해묵은 이슈를 다시 꺼낸 것이기에 어느 쪽이 맞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정통성 문제, 어머니 박두을 여사 타계 당시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감정적 문제로 번져 양측 모두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맹희 전 회장은 결심 공판이 있기 전인 지난 12월 24일 이건희 회장 측에 화해조정 신청을 한 바 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 측은 “돈의 문제가 아닌 정통성의 문제”라며 거절했다. 이런 와중에 이맹희 전 회장의 편지가 다시 한 번 양측 간에 논란이 되면서 법조계 관계자들은 삼성가 형제의 극적 화해는 이뤄지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게다가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청구금액을 대거 올렸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맹희 전 회장 측은 결심공판을 앞두고 이건희 회장의 경영권에 위협을 가할 의도가 없다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것처럼 에버랜드에 들어간 삼성생명 주식과 배당액 165억여 원에 대해서는 소를 취하했다. 그러더니 다른 주식에 대한 청구금액을 기존 1600억 원에서 9400억 원으로 확대했다. 결국 이맹희 전 회장 측이 말하는 화해 제스처의 목적은 결국 돈”이라고 깎아내리며 “형으로서 정말로 화해를 하기 원한다면 소를 취하하면 그만이다. 그러면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삼성가 상속소송 항소심은 오는 2월 6일 선고를 내리며 기나긴 형제전쟁이 일단락된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