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무르익은 오대산 줄기 만월산 중턱엔 고요한 사찰이 하나 있다. 이 절의 주지는 24년 전 맨땅에 터를 잡고 손수 절을 일군 현종 스님. 이맘때면 템플 스테이를 찾는 손님들과 함께 낙엽을 밟으며 불교에서의 산책인 포행 다니는 게 낙이다. 그
런 스님 옆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안내하는 견(犬) 보살들이 있다. 약 14년 전 속초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온 '흰둥'이와 8년 전, 동네 할머니네 집에서 입양해온 '현덕'이다.
그런데 포행을 마치고 사찰로 돌아오니 어쩐지 태도가 싹 바뀌는 녀석들. 스님이 불러도 본체만체 간식을 줘도 냉큼 먹고 도망가기 바쁘니 한 번 쓰다듬고 싶어도 마음 같지 않다. 그렇다고 개들이 사람을 아예 안 따르는 건 아니다.
사찰에 온 지 불과 1년 밖에 안 된 종무소 사무장에겐 손도 척척 주고 심지어 배까지 내보이며 갖은 애교를 다 떤다. 얼마 전까지 만해도 스님만 졸졸 따라다녔다는 견 보살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제 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변함없이 옆에 있는 가족은 흰둥이와 현덕이에요."
스님이 출가한 것은 20대 중반 고향인 합천에서 살던 어린 시절 해인사를 자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 되어 ‘발심 출가’를 결심했다. 머리를 깎는 순간부터 가족과 떨어져 외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 그래서 스님의 곁엔 항상 견 보살들이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40년 가까이 도를 닦은 스님일지라도 개들과의 관계가 항상 좋을 순 없다는 것. 녀석들을 위해 개집 월동준비도 해주고 주머니엔 항상 간식을 넣어 다니지만 어쩐지 스님의 짝사랑만 점점 깊어간다. 보다 못한 사무장이 특단의 조치에 나섰다. 반려견 전문가를 사찰에 부른 것. 스님과 흰둥이, 현덕이의 모습을 관찰한 훈련사는 그들의 사이가 생각처럼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럼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동물은 모습만 다르지 마음은 사람과 똑같아요. 그래서 동식물 천도재를 지내줍니다."
조용한 사찰이 아침부터 북적인다. 대웅전에 마련된 영단에는 갓 뜯어온 칡 이파리부터 개 사료가 푸짐하게 차려지고 한쪽에는 반려견 영정사진과 이름이 적힌 위패가 놓여있다.
알고 보니 1년에 한 번 동식물 천도재가 열리는 날, 죽은 동물과 식물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곳으로 보내주기 위해 기도를 올리는 현종 스님. 동식물을 아끼는 마음으로 사찰을 개산하던 이듬해부터 매년 천도재를 올리고 있다.
천도재를 마치고 유난히 흰둥이가 눈에 밟히는 스님. 올해로 벌써 14살이 넘은 데다 지난해엔 슬개골 수술을 2번이나 해서 다리도 불편한 녀석이 언제 곁을 떠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챙긴 스님은 흰둥이를 위해 영정사진을 찍기로 한다.
동·식물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는 현종 스님과 그 옆을 지키는 흰둥이, 현덕이의 유쾌한 수행일기를 만나본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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