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9월 제일저축은행이 영업정지됐을 당시 모습. 여의도지점 고객들이 가지급금을 찾기 위해 창구에서 대기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당초 이번 사건의 발단은 제일저축은행 불법대출 의혹이었다. 지난해 10월 저축은행비리합동수사단은 고객 1만 1600여 명의 명의를 도용해 1200억 원대 불법 대출을 일으킨 혐의 등으로 유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하지만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친인척을 비롯해 정·관계 유력인사들에 대한 로비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파문은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이틀이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리스트’로 인해 정가는 꽁꽁 얼어붙었고 총선정국에서 유 회장은 ‘정치인들의 저승사자’로 불리고 있는 실정이다.
핵심은 강원도 동해 출신으로 지역 내 마당발로 활약해온 유 회장이 오랜 기간동안 이 지역 출신 정·관계 인사들을 관리하면서 정치자금 및 로비 명목으로 금품을 수시로 건넨 정황이 포착됐다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검찰은 유 회장의 전화 통화 및 금전거래 내역, 제일저축은행 임직원 진술 등을 바탕으로 유 회장이 체계적으로 관리해온 정·관계 인사들의 명단을 확보, 수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유 회장의 로비가 이 대통령 측근인사를 포함해 정치인 등 사회유력인사들을 상대로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왔다는 사실이다. 검찰은 유 회장이 평소 친분을 쌓아온 인맥을 동원해 정치권과 금융당국 등을 상대로 광범위한 로비를 시도한 단서를 잡고 수사를 진행 중이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이 대통령 측근에 대한 로비 의혹이었다. 유 회장은 이 대통령의 사촌처남인 김재홍 KT&G복지재단 이사장(구속)에게 “제일저축은행의 퇴출을 막아 달라. 금융감독원 국장급 인사의 승진을 도와 달라”는 등의 청탁과 함께 총 11차례에 걸쳐 4억 2000만 원을 건넨 것으로 드러났다. 또 유 회장은 이상득 의원실 박배수 보좌관(구속)에게도 “제일저축은행의 다른 저축은행 인수 등과 관련해 예금보험공사가 편의를 봐 주도록 도와 달라”며 1억 5000만 원을 건넨 혐의를 받았다.
이 대통령 친인척이 구속된 것은 2008년 30억 원대 공천청탁 사기 혐의 등으로 김윤옥 여사의 사촌언니 김옥희 씨에 이어 두 번째다. 특히 청와대는 ‘유동천 리스트’에 이 대통령의 손윗동서 황태섭 씨마저 등장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임기 말에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이 대통령 측근비리 범위와 실체 를 둘러싸고 적잖은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유 회장은 황 씨에게 고문료 명목으로 3년간 약 4억 원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검찰은 유 회장이 금융전문가가 아닌 황 씨를 고문으로 위촉했다는 점에서 영업정지를 막기 위한 로비 역할을 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황 씨의 비리혐의가 확인될 경우 적잖은 정치적 파장이 예상된다.
유 회장이 국세청 고위간부에게도 로비를 해온 정황이 드러났다. 지난해 12월 20일 검찰은 ‘국세청 현직 고위 간부에게 전달해 주겠다’며 2008년 무렵 유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신 아무개 씨를 체포했다. 또 검찰은 유 회장이 전직 지방국세청장 출신 인사에게도 돈을 줬다는 진술을 확보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수사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유 회장의 관리대상에는 전·현직 검사장급 인사 등 법조계 유력인사도 다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추후 유 회장의 진술에 따라 수사 범위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정치권이 발칵 뒤집힌 이유는 유 회장이 전·현직 국회의원 다수에게 돈을 건넨 정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 회장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거나 석연찮은 의혹을 받고 있는 정치인도 적지 않다.
윤진식 새누리당 의원은 2010년 7·28 재·보궐선거에 출마했을 때 2000만∼3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하지만 유 회장이 윤 의원에게 돈을 건넸다는 시기가 대통령정책실장 퇴임 이후라는 점에서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따라서 유 회장이 인사 로비나 수사 무마 등 구체적인 청탁대가로 돈을 건넸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한 당장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하지만 윤 의원이 유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될 수도 있다. 특히 4·11 총선에서 승리가 확실시될 만큼 지역 내(충북 충주)에서 윤 의원의 지지율이 탄탄하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 수사 추이에 따라 충주지역 총선구도는 크게 요동을 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도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유 회장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1억 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또 무소속 최연희 의원과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이화영·김택기 전 열린우리당 의원 등은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불구속기소된 상태다. 유 회장과 엮인 이들 정치인들은 대부분 대가성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할 소지가 크다. 사법부의 판단에 따라서는 정치생명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월 불법정치자금 수수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돼 지사직을 상실한 이광재 전 지사의 경우 이번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지만 선거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이다. 실제로 이 전 지사는 자신의 정치적 텃밭인 강원도 일대를 순회하며 민주통합당 후보와 지인들의 선거운동을 막후에서 지원하고 있다.
또 민주통합당 공천(강원 동해 삼척) 하루 전 날 이 전 지사와 함께 불구속 기소된 이화영 전 의원이 보도자료를 통해 억울함을 항변하며 총선 승리를 향한 강한 포부를 밝힌 상태다. 하지만 그는 유 회장과 엮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거에 적잖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이고, 사법부의 판단 여부에 따라서는 선거 후에도 여진이 지속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각 정당 역시 ‘유동천 게이트’가 총선정국에 미칠 유불리를 따지며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특히 유 회장이 터를 잡고 활동한 강원지역 정치인들이 줄줄이 재판에 넘겨진 상황에서 사정당국 주변에선 추가 ‘리스트’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유 회장으로부터 5000여 만 원을 받은 혐의로 이철규 전 경기지방경찰청장이 구속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전 청장과 유 회장은 강원도 동향인데다 중·고교 동문으로 30년 넘게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검찰은 유 회장의 입에서 학연, 지연, 혈연관계로 얽힌 정·관계 고위인사들에 대한 진술이 추가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유 회장을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유동천 리스트’에 이 대통령의 측근과 친인척이 오르내린 상황에서 정치인과 경찰 간부까지 연루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총선을 앞둔 정치권은 ‘유동천 게이트’의 불똥이 어디까지 튈지 예의주시하고 있는 분위기다.
가장 큰 문제는 ‘유동천 게이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정권 실세의 친인척·측근 2명이 사법 처리되고 수사선상에 오른 여야 정치인 수 명이 소환되고 일부는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하지만 사정당국 주변에선 지금까지 드러난 것 외에 또 다른 ‘유동천 리스트’가 공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사건 초기부터 검찰은 유 회장이 권력 실세와 지역 정치인뿐 아니라 검경과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 고위 공무원도 관리해왔다는 정황을 잡고 수사를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드러난 ‘유동천 리스트’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이 사건이 ‘권력형 게이트’로 확전될 것이란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형국이다.
총선을 코앞에 둔 정치권이 ‘유동천 게이트’와 관련한 검찰 수사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일수로 시작…업계 넘버3까지
지난해 10월 불법대출 혐의로 체포된 후 정·관계를 떨게 하고 있는 유동천 회장은 국내 저축은행의 대부로 꼽히는 인물이다. 스물여덟 살이던 1968년 동대문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한 일수업체 삼호상역을 설립해 재산을 불린 유 회장은 상호신용금고법이 생기면서 ‘제일상호신용금고’(97년 3월)와 ‘제일상호저축은행’(2002년 3월)으로 이름을 바꿨다.
유 회장은 약 40년간 저축은행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금융인이다. 외환위기 당시 유 회장은 경안상호신용금고(1997년)에 이어 신영(1998년)·일은(1999년)·신한(2000년) 상호신용금고를 잇달아 인수하는 기염을 토하며 서민들을 상대로 한 저축은행업계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이처럼 성공적인 금융인 신화를 써가던 유 회장은 2008년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되면서 그의 이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2004년 무궁화교역·부산자원 등에 부동산을 담보로 총 456억 원을 대출해 주는 과정에서 부실대출 심사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유 회장은 그가 이끌던 제일저축은행이 지난해 9월 19일 상장 14년 만에 상장폐지 절차에 들어가면서 최대 위기상황에 직면했다. 영업정지 처분을 받을 당시 제일저축은행은 5개 지점에 임원 9명, 직원 456명, 수신·여신 규모가 3조 원대로 저축은행 업계 3위였다.
하지만 불법대출 의혹 사건이 터지면서 유 회장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특히 유 회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전 방위적인 정관계 로비 의혹은 권력형 게이트 형태를 띠면서 금융계와 정관계를 뒤흔들고 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