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합뉴스 |
“타선을 보라. 4번 이대호를 보면 느끼는 게 없나. 일곱 난쟁이 가운데 서 있는 영락없는 거인이다.” 3월 13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을 찾았을 때다. 이날 오릭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경기 전 오릭스 선수들의 훈련장면을 지켜보던 아사히방송의 다노 가즈히로 캐스터는 손가락으로 이대호를 가리키고선 대뜸 “거인”이라고 칭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대호는 거인 그 자체였다. 건장한 동료선수들도 그 옆에 서면 고교생처럼 보였다. 하지만, 다노 캐스터의 지적은 체구 때문이 아니었다.
“2년간 7억 엔을 받는 선수는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다. 특히나 올 시즌 이대호의 연봉 2억 5000만 엔은 지난해 기준으로 따지면 NPB(일본야구기구) 전체 21위이자 퍼시픽리그 타자 가운덴 3번째로 높은 금액이다. 무엇보다 기존 오릭스 최고연봉자이자 에이스인 가네코 치히로보다 9000만 엔이나 높다. 일본에서 성과가 전혀 없는 선수에게 이토록 많은 연봉을 안겨줄 팀은 (요미우리) 자이언츠밖에 없기에 이대호를 ‘오릭스의 거인’이라고 부른 것이다.”
오릭스는 ‘짠물 구단’으로 유명하다. 몸값이 비싼 FA(자유계약선수) 영입은 꿈도 꾸지 않는다. 소속팀 FA도 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설령 외부에서 FA를 영입한다손 쳐도 실력이 떨어진 노장이 대부분이다. 그런 오릭스가 외국인 선수 이대호에게 한해 연봉으로 2억 5000만 엔을 주는 ‘요미우리적인’ 투자를 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현장에서 지켜본 이대호는 위상도 ‘거인’ 그 자체였다. 모든 훈련 프로그램이 이대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티배팅과 프리배팅, 주루, 수비훈련 모두 이대호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기존 4번 타자인 T-오카다는 이대호 다음이었다. 훈련과 경기가 끝나고서 받는 마사지도 이대호가 1순위였다. 코칭스태프도 이대호에게 별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좋은 예가 있다.
13일 요미우리 전에서 이대호는 4번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요미우리 선발투수는 사와무라 히로시. 요미우리가 자랑하는 신진 에이스와 한국을 대표하는 강타자와의 맞대결은 그래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승부는 싱거웠다. 이대호는 3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이날 무안타로 이대호의 시범경기 타율은 1할7푼6리까지 떨어졌다. 홈런과 타점은 1개도 기록하지 못한 상태였다. 경기가 끝나고 오릭스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은 부진했던 선수들을 거론했다. 그러나 이대호는 호명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반대였다. 요미우리전에서 이대호가 3타수 1안타 2타점을 기록하자 오카다 감독은 가장 먼저 이대호를 입에 올렸다.
“요미우리의 에이스 우쓰미 데쓰야를 상대로 귀중한 타점을 기록했다. 타격 감각이 매우 뛰어난 타자다.” 오카다 감독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하다. 외국인 선수에겐 더하다. 그런 오카다 감독이 공개 석상에서 이대호를 극찬했으니 일본 언론이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삼성과 오릭스의 연습경기.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구단의 대접이 남다르면 시샘하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호는 예외다. 팀 동료와 야구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이대호를 적극 옹호한다. 오릭스 선발투수 기사누키 히로시는 지난해 박찬호와 절친한 사이였다. 기사누키는 “박찬호, 이승엽도 그랬지만 이대호 역시 고액 연봉자임에도 매우 겸손하다”며 “외국인 선수임에도 경기 중 먼저 ‘파이팅’을 외치고, 젊은 투수들의 엉덩이를 두들기는 등 뭐든 솔선수범하는 선수”라고 평했다. 베테랑 내야수 기타가와 히로토시는 이대호의 훈련 태도를 칭찬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타격훈련을 빠짐없이 수행한다. 다른 외국인 선수라면 ‘내가 왜 이 훈련을 해야 해?’라고 의문을 나타낼 테지만 이대호는 주루훈련도 매우 적극적이다. 나보다 체중이 많이 나가는데도 참 열심히 뛰어 놀라울 정도다.” 오카다 감독 역시 “큰돈을 받는 선수라면 열심히 뛰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빙그레 웃으며 “한국에서도 저렇게 열심히 뛰었느냐”고 반문할 정도로 은연중 만족감을 나타냈다.
오릭스 나카무라 준 국제편성부 과장은 이러한 찬사가 이대호의 성격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대호는 무척 밝은 선수다. 이승엽도 착했지만, 이대호는 착하면서 매우 적극적이다. 먼저 선수들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그것이 팀 적응이 빠르고 팀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싶다.”
오릭스 팬들의 평도 좋다. 오릭스의 50년 팬 요시모토 아이(61)는 “이대호의 해맑은 웃음을 보고 팬이 됐다”며 “삼진을 당해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떳떳하게 벤치로 돌아가는 자세에서 신뢰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3, 14일 교세라돔을 찾았을 때 오릭스 팬들은 이대호가 타석에 등장하면 “이대호 홈런!” 하며 열띤 응원을 보냈다. 오릭스 공식 응원단은 “4번 타자 이대호를 위해 멋진 응원가를 준비 중”이라며 “가사 일부에 부산 사투리를 쓸 계획”이라고 털어놨다.
언론에서도 환영 일색이다. 다노 캐스터는 이대호와 처음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저는 다노 캐스터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는 말을 한국어로 했다. 그러자 이대호가 환하게 웃으며 “한국말 잘하시네요”라고 이야기를 걸어줬다고 했다. 일본은 한국과 달리 기자가 철저히 ‘을’이라, ‘갑’인 선수들에게 쩔쩔 맨다. 그런 풍토 속에서 슈퍼스타 이대호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대부분의 일본 기자는 “이대호가 말을 걸면 대답을 잘해준다”며 “일본 야구계에서 유일한 언론 프렌들리 선수”라고 입을 모았다.
일단 이대호의 그라운드 밖 팀 내 입지는 단단한 느낌이다. 문제는 그라운드 안이다. 성적을 내지 못하면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팀 성적을 고려해 비싼 돈을 주고 영입한 외국인 선수라면 성적이 우선이다. 이대호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조심하는 측면이 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지나친 자신감은 표출하지 않는다. 올 시즌 목표를 물어도 대답은 원론적인 수준이다. “숫자로 목표를 이야기하면 결국 그걸 채우려고 무리하게 된다. 4번 타자지만, 팀을 위해선 볼넷으로 출루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홈런 목표치를 이야기하면 그게 생각나 스윙이 커질 수 있다.”
물론 이대호가 넘어야 할 고비는 아직 많다. 일본 투수들은 타자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외국인 타자에겐 몸쪽 위협구를 서슴지 않고 던진다. “일본 투수들은 몸쪽 위협구를 잘 던진다. 투스트라이크 스리볼에서도 변화구를 던져 타자를 유인한다. 그렇다고 대응책이 없는 건 아니다.” 이대호가 밝힌 대응책은 정면 돌파였다. “만약 위협구가 날아오면 절대 참지 않을 거다.”
14일 교세라돔에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시범경기 2차전이 열렸다. 1할대 타율의 이대호는 다시 4번 1루수로 선발 출전했다. 요미우리 선발투수는 우쓰미 데쓰야. 지난해 18승을 차지한 요미우리의 왼손 에이스였다. 우쓰미가 2회까지 오릭스 타선을 완벽하게 봉쇄한 까닭에 요미우리가 1대 0으로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3회. 오릭스는 안타와 상대의 실책을 묶어 2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타석엔 이대호였다. 그때 경기 전 이대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욕심내지 않을 거다”였다. 6번의 시범경기에서 홈런과 타점을 한 개도 기록하지 못한 4번 타자라면 한방을 노릴 만도 했다. 관중석에서도 “이대호 홈런!”이라는 응원소리가 들렸다. 우쓰미도 그걸 눈치챘는지 바깥쪽 변화구로 헛스윙을 노렸다.
“딱!” 배트에 공이 맞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순간, 관중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러나 타구는 외야로 날아가지 않았다. 기대했던 홈런이 아니었다. 대신 타구는 1, 2루를 관통하는 우전안타였다. 이 안타로 오릭스는 2 대 1 역전에 성공했다. 가뜩이나 이대호의 일본 진출 첫 시범경기 타점이라 의미가 깊었다. 그랬다. 이대호는 등번호에 연연하지 않았다. 유니폼 앞면에 새겨진 팀명에 주목했다. 그래서 풀스윙을 자제하고 정교한 타격을 선보였던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오카다 감독은 “2사 만루에서 이대호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며 “우쓰미 같은 에이스를 상대로 얻어낸 안타가 더 값지다”고 평가했다.
이대호의 시범경기 성적이 부진하면서 국내 언론은 그가 역대 일본 진출 한국 선수들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며 걱정한다. 하지만, 기우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대호가 그라운드 안팎으로 역대 어느 한국인 선수보다 꼼꼼하게 일본 무대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가 끝나고 일본의 유명해설가 에모토 다케노리는 이대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단점을 어떻게 극복하고, 장점을 어떻게 극대화해야 하는지 아는 선수다. 몸쪽 공에 대비하면서도 바깥쪽 공을 능숙하게 쳤다. 머리가 보통 영리한 선수가 아니다. 투수들은 이대호의 단점을 파악하기보다 그의 장점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대호를 지나치게 저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