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에서 장진수 전 주무관에 흘러간 자금 출처를 파악하기 위해 계좌 추적을 하고 있는 가운데 이 돈이 정권 실세가 만든 ‘비자금’이란 관측이 나돌고 있다. 2010년 수사 때 ‘몸통’으로 거론된 바 있는 박영준 전 차관이 다시 한번 의혹의 정점에 서게 됐다. 사진공동취재단 |
증거인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입막음용’으로 받았다고 밝힌 돈의 총 액수는 1억 1000만 원이다. 2011년 4월 류충열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옛 공직윤리지원관)으로부터 5000만 원, 2011년 8월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에게는 2000만 원을 받았다. 장 전 주무관에게 증거인멸을 지시한 최종석 전 청와대 행정관은 변호사 비용 등을 포함해 2010년부터 총 4000만 원을 건넸다. 이에 대해 이영호 전 비서관과 류충열 관리관 등은 “선의의 목적으로 돈을 줬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이와는 별개로 2010년 9월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도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이던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과 진경락 지원관실 총괄기획과장 가족들에게 ‘금일봉’을 전달했던 것으로도 드러났다.
이러한 돈 거래는 청와대가 재판을 받던 도중 심경 변화를 일으킨 장 전 주무관의 마음을 되돌리려 했다는 의혹과 맞닿아 있다. 장 전 주무관은 1심 재판을 한 달 앞두고 있던 2010년 10월 최종석 전 행정관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생을 먹여 살려 줄 테니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말라”며 “캐시(현금)를 달라고 하면 내가 그것도 방법을 찾아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당시 최 전 행정관은 장 전 주무관에게 “검찰 구형을 낮춰주고, 현대차 그룹에 재취업시켜 주겠다”는 제안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장 전 주무관을 회유하려는 1차 시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1심 재판에서 실형이 선고된 후 장 전 주무관이 ‘진실 폭로’ 의사를 다시 밝히자 청와대는 다급해졌다. 이는 이인규 전 지원관 후임으로 임명된 류충열 관리관과 장 전 주무관이 2011년 1월 나눈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류 관리관은 “5억에서 10억 사이는 충분히 될 것 같다”면서 “결국 벌금형으로 가게 돼 있다”고 언급했다. 그 후 류 관리관은 장석명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 마련한 돈이라며 5000만 원을 장 전 주무관에게 건넸다. 장 비서관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표적인 ‘S라인(서울시청 공무원 출신)’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선조직’인 영포라인에 의해 주도된 민간인 불법 사찰을 대한민국 사정기관의 컨트롤타워인 민정수석실이 은폐하려 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장 비서관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했다.
검찰에서도 장 전 주무관을 중심으로 이뤄진 돈 거래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검 중수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기자에게 “사찰이 아닌 증거인멸만을 했던 주무관에게 그 정도 돈(5억~10억)을 제시했다면 그 윗선은 어땠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 돈이 국고에서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자금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대어’를 낚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취재 결과, 지난 3월 16일 꾸려진 특별 수사팀(박윤해 부장검사)은 현재 장 전 주무관에게 흘러들어간 돈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계좌 추적 등을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의 중수부 관계자는 “결국 이 사건을 은폐하고자 했던 ‘몸통’에게서 돈이 나오지 않았겠느냐. 또한 그 몸통이 민간인 불법사찰 보고라인의 가장 윗선일 것이다. 돈의 출처를 밝혀내는 게 이번 수사의 핵심”이라고 귀띔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장 전 주무관 폭로로 불거진 자금에 대해 국가정보원 특수 활동비 혹은 민정수석실 예산의 일부라는 얘기가 나온다. 그러나 야권과 검찰은 정권 실세가 조성한 ‘비자금’일 것이란 관측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민주통합당의 한 중진 의원은 “내가 청와대에 근무해 봐서 잘 안다. 공무원 활동비로 수억 원을 조달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어딘가 자금을 대주는 곳이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면서 “이명박 정부의 한 실세가 만든 돈으로 비선라인을 운영했을 뿐 아니라 사건 발생 후 은폐를 위해 돈을 뿌렸던 것은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검찰 역시 장 전 주무관에게 돈을 건넨 인물들은 중간에서 배달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보는 기류가 역력하다.
이 경우 영포라인의 정점에 있는 박영준 전 차관에게로 자연스레 시선이 모아진다. 이명박 정부에서 ‘왕비서관’, ‘왕차관’으로 불리며 영포라인을 이끌었던 박 전 차관이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의 새로운 변수로 떠오른 자금 문제에 연루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2010년 검찰 수사 때도 박 전 차관은 민간인 불법 사찰의 몸통으로 거론된 바 있다. 그러나 검찰은 총리실 직원들만을 사법처리하며 수사를 종결해 부실수사라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김준규 검찰총장조차도 ‘실패한 수사’라는 반응을 내놓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번 재수사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박 전 차관 조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특히 검찰이 진행 중인 계좌추적이 박 전 차관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이 퍼지고 있어 그동안 설로만 돌았던 ‘박영준 비자금’의 실체가 드러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중수부 관계자는 “박 전 차관이 (수사) 선상에 오른 것은 맞다. 자금 부분 역시 포함될 것”이라면서 “수사하다 보면 박 전 차관과 관련해 지금까지 제기됐던 몇몇 소문들의 진상도 어느 정도 풀리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민간인 불법 사찰 재수사가 박 전 차관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로까지 확산될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 정치권에선 박 전 차관이 관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금에 대해 설이 분분하다. 정권 초반 박 전 차관과 ‘파워 게임’을 벌였지만 패했던 소장파 관계자들은 “대선에서 승리한 후 여러 군데서 축하금이 들어왔다. 관행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돈 중 일부를 박 전 차관이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서 영포라인에 속했던 인사들이 사용했던 활동비 등이 여기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은 “박 전 차관이 지난 2007년 만든 MB 대선캠프 선진국민연대 출신들이 인수위와 정권 초반 여러 공기업과 대기업 인사에 관여하면서 커미션을 받았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받았던 돈을 박 전 차관이 한 금융권 인사에게 맡겨 놓고 관리했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 지난 3월 20일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증거인멸 의혹을 폭로한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사찰은 부업 이권개입이 본업?
정치권과 검찰 관계자들은 이번 민간인 불법 사찰 재수사에서 또 다른 사례들이 나올지에도 관심을 보인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본업인 공무원 비위 감찰은 물론 정·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사찰을 했다는 진술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민간인 사찰은 우연히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정치권 사찰이 문제의 핵심”이라면서 “얼마나 구린 내용이 많았으면 검찰 수사를 앞두고 허겁지겁 하드디스크까지 파기했겠느냐”고 꼬집었다. 얼마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전직 조사관도 “2008년 겨울부터 2009년까지 재계 총수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사찰을) 실시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사실 지난 2010년 민간인 불법 사찰 수사 때도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광범위한 사찰을 한 정황이 포착됐다. 당시 검찰 수사팀은 원충연 전 사무관의 수첩을 확보했는데, 여기엔 여당 유력 정치인·노동계 관계자·언론인 등을 사찰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총 108쪽 분량이었다. 또한 차기 대권주자 중 한 명으로 꼽히던 오세훈 전 서울시장, 친박계 이혜훈 의원, 친이계 원희룡·공성진 의원 이름도 적혀 있었다.
사찰을 위해 망원경·카메라 등을 도구로 사용했고, 그 결과를 청와대와 국정원 등에 수시로 보고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특히 ‘보안’을 강조하는 문구들이 여러 군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검찰은 김종익 전 KB한마음 대표 외에 불법 사찰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최근 검찰 안팎에선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사찰뿐 아니라 이권개입에도 관여했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중수부 관계자는 “정부기관인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사조직인 영포라인에 의해 사적으로 운영됐다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국기 문란’ 사건”이라면서 “이 내용도 수사 대상에 포함됐다”고 말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수집한 보고 내용은 원래 체계대로라면 총리실장 혹은 민정수석실로 올라가야 하지만 영포라인 이영호 전 비서관을 거쳐 박영준 전 차관에게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공직윤리지원관실 보고서에는 ‘EB’(이영호)와 ‘민정’이라는 표시란이 있는데, EB에만 표시되면 민정수석실에는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를 놓고 한 전직 민정수석은 이 전 비서관에게 “그럴 거면 민정실로 와서 일하라”며 화를 낸 적도 있다는 후문이다.
지난 3월 14일 한 소장파 의원도 사석에서 “정치인, 민간인 사찰은 부업이었고 진짜 주로 했던 것은 기업 이권개입이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국세청, 감사원 등을 동원해 ‘조지는’ 게 그들의 주 임무였다. 그 대표적 예가 A 사의 인사 청탁이었다. A 사 인사를 좌지우지하려 했지만 A 사 측에서 말을 듣지 않자 임원들을 탈탈 털었다. 심지어는 한 임원의 여자관계까지 들여다봤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친박연대 출신으로 당선된 한 의원을 떨어뜨리고 보궐선거를 만들기 위해 해당 의원도 집중 사찰을 했다. 알고 보니 그 선거구에 이번 사태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인물과 친한 사람이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은 “인사 청탁 혹은 이권 개입을 그냥 해줬을 리는 없지 않느냐. 대가를 받고 했을 것이다. 국가 조직을 동원해 사익을 추구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