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 현역에서 뛰고 있는 송지만.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
송지만의 올해 나이는 마흔 살이다.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不惑)’이다. 사실 송지만은 이전에도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던 선수였다. 술·담배를 멀리하고, 나쁜 음식을 철저히 삼가며 ‘자기관리의 대명사’로 불렸다.
강병철 전 한화 감독은 루키 송지만을 잘 기억하고 있다. “1996년 내가 한화 감독일 때 인하대를 졸업한 신인 외야수가 들어왔다. 송지만이었다. 참 열심히 훈련했다. 하루는 훈련장에서 식사를 하는데 저 멀리서 송지만이 식판을 앞에 두고 기도를 하지 뭔가. 종교가 다른 선참들에게 밉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송지만을 불러 내 옆에 두고 밥을 먹게 했다. ‘종교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기독교’라고 했다. 난 불교였지만, 종교인처럼 성실한 송지만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정신 상태라면 뭘 하든 되겠다’싶어 자주 경기에 출전시켰다.”
프로 데뷔 첫 해였던 1996년 송지만은 강 감독의 배려에 힘입어 122경기에 출전했다. 결과는 좋았다. 타율 2할8푼7리, 18홈런, 53타점을 기록했다. 현대 신인으로 ‘30(홈런)-30(도루)’을 기록한 동갑내기 박재홍만 없었다면 그해 신인왕은 송지만의 차지였을지도 모른다.
송지만은 이후로도 꾸준하게 활약했다. 2003년과 지난해를 제외하고 15년 동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고, 2003년을 빼면 16년 동안 100경기 이상 출전했다. 철저한 자기관리와 주변의 유혹을 단칼에 뿌리쳤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 야구에만 몰두하는 ‘빵점 아빠’지만 두 아들에게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당당하게 은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오늘도 달린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
송지만은 리그 개인 통산 타자 부문에 골고루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통산 1890경기 출전은 역대 8위, 1849안타는 4위, 309홈런과 1018타점은 공히 6위다. 그보다 상위 기록 보유자들은 양준혁, 전준호, 이종범, 장종훈, 이승엽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타자들이다. 그러나 송지만은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KBS 이용철 해설위원은 “송지만이야말로 리그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라고 말한다. 그가 세운 눈부신 기록에 비해 대우와 인지도는 떨어진다는 게 이유였다. 실제로 송지만은 통산 기록을 제외하고도 기록의 사나이였다.
1999년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고,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연속 22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장종훈, 김태균도 이루지 못한 한화 구단 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여기다 송지만은 1999년 타율 3할1푼1리, 22홈런, 74타점을 기록하며 그해 한화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0, 2002년엔 외야수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다. 2004년 현대로 트레이드된 이후에도 송지만은 해마다 타율 2할7푼, 15홈런 이상을 치며 중심타자로 군림했다. 2004년엔 현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를 양준혁, 이승엽, 이종범, 장종훈처럼 대타자로 인식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가 뛰었던 팀들이 하나같이 한화, 현대, 넥센 등 비인기팀이었기 때문이다. 송지만도 이를 잘 안다.
“야구선수는 팬들의 인기를 먹고 자라는 나무다. 아무리 열매를 많이 맺어도 그걸 따는 사람들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도 팬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불행한 야구선수다. 하지만 소수 팬이라도 나를 지켜보고 지지했기 때문에 마흔 살이 돼서도 야구를 계속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그도 인기팀에 갈 기회가 있었다. 2003년 12월이었다. 그때 송지만은 투구에 맞아 오른쪽 팔이 부러져 74경기에만 출전했다. 개인 성적도 타율 2할5푼3리, 9홈런, 34타점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전 해 송지만은 타율 2할9푼1리, 38홈런, 104타점으로 최고의 시즌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화는 송지만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한화가 내세운 표면적 배경은 ‘투수진 강화’였다. 그러나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당시 유승안 한화 감독과 송지만은 불편한 관계였다. 팀의 기강을 다잡으려는 유 감독과 선참 송지만은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했다.
“유 감독님께 수차례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감독님한테 달려가 부탁하기도 했다. 결국, 감독님이 이 팀 저 팀을 알아봐 줬다.”
애초 송지만은 삼성 노장진과의 트레이드가 유력했다. 유 감독과 삼성 김응용 감독이 트레이드에 합의해 도장만 찍으면 됐다. 삼성은 “우리 팀에 오면 FA를 선언하지 않는 조건으로 다년계약을 해주겠다. 얼마를 원하느냐”는 언질까지 줬다.
하지만, 도장을 찍는 날, 김 감독이 마음을 바꿨다. “노장진을 계속 마무리로 써야겠다”며 트레이드 무효를 주장했다. 송지만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삼성행이 좌절되고서 크게 낙담했다. 나중에 유 감독님과 현대 김재박 감독님이 트레이드에 합의해 현대로 갔다. 당시는 공교롭게도 현대가 서서히 어려워질 때였다. 대전구장을 떠나 수원구장으로 떠나려는데 참 마음이 착잡했다.”
2005시즌이 끝나고선 롯데로 갈 뻔했다. “당시 난 ‘FA 빅3’로 불렸다. 현대와의 협상에서 4년에 30억 원을 불렀다. 하지만, 구단은 3년에 18억 원을 제시했다. 원소속구단협상이 끝나고 롯데에서 연락이 왔다. 롯데는 ‘4년에 21억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마이너스 옵션 4억 원이 지나치게 빡빡했다. 당시 롯데 사령탑이 데뷔 첫 해 은사였던 강병철 감독님이시고, 롯데는 늘 뛰고 싶던 팀이라, 옵션을 조금 조정만 하면 롯데 유니폼을 입으려 했다. 그러나 롯데 측은 ‘옵션 조정은 안 된다’고 했다. 롯데 측의 입장이 하도 단호해 나도 은근히 자존심이 발동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현대에 남게 됐다.”
만약 송지만이 삼성이나 롯데 유니폼으로 바꿔 입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는 ‘리그에서 가장 저평가된 선수’로 기억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송지만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화, 현대, 넥센은 모두 착한 선수들만 있다. 특히나 현대가 히어로즈에 인수되며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다. 만약 내가 다른 팀으로 옮겼다면 그런 어려움은 남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선후배들과 더욱 돈독한 사이가 됐다. 돈과 명예는 손에 쥐지 못했어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행복이다.”
▲ 브라보, 마이 라이프! 후배 자리를 뺏는 것 같아 고민하던 송지만은 “프로는 실력으로 승부한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다시 타올랐다. 2011년 시즌 초반 벤치에 머물렀던 그의 방망이는 시즌 중반 신나게 춤을 췄다. 사진은 합성.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
2011시즌 초반 송지만은 주전으로 출전하지 못했다. 주로 대타로 나왔다. 초반 성적이 좋지 않은 탓이 컸다. 여기다 코칭스태프가 세대교체를 위해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베테랑 송지만을 벤치에 앉힌 것도 한 배경이었다. 전 해 타율 2할9푼1리, 17홈런, 63타점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던 송지만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코칭스태프의 의중을 군말 없이 따랐다.
이때 송지만은 ‘내가 후배들의 자릴 뺏는 게 아닌가’하고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갔다. 그러나 아내 김희연 씨의 생각은 달랐다. 남편이 누구보다 야구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다.
“프로는 실력으로 승부하는 거예요. 당신이 없다고 해서 실력이 떨어지던 후배가 갑자기 잘하는 것도 아니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더 잘하는 것도 아니에요. 프로답게 마지막까지 실력으로 겨뤄보세요.”
생각을 고쳐먹은 송지만은 그해 시즌 중기부터 폭발했다. 2할대 초반의 타율이 2할6푼6리까지 올랐다. 홈런도 영양가 만점이었다. 동점, 역전 홈런이 대부분이었다.
코칭스태프도 베테랑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김시진 넥센 감독은 다시 송지만을 중용하며 변함없는 신뢰를 나타냈다.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시즌이 끝나고 연봉협상 때 구단은 5000만 원이 삭감된 2억 원을 제시했다. 송지만은 발끈했다.
“2006년 현대와 3년 18억 원에 FA 계약했지만, 2008년 히어로즈가 현대를 인수하며 기존 계약을 인정하지 않아 7억 원 가까운 돈을 손해 봤다. 하지만 그때도 구단의 어려움을 고려해 묵묵히 연봉 삭감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번엔 아니었다. 손해만 볼 순 없었다. 그래서 동결을 주장했다.”
넥센은 연봉 미계약자는 미국 스프링캠프에 합류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그래도 송지만은 버텼다. 결국 송지만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다. 전남 강진에 남아 2군 선수들과 훈련했다.
“노장이라고 홀대하는 건 잘못이다. 성적에 따라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마침내 구단도 내 의지를 존중해 연봉 동결안을 제시했다. 덕분에 일본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수 있었다.”
개인훈련을 충실히 진행한 까닭에 송지만은 젊은 선수 못지않은 탄탄한 몸을 유지하고 있다. 3월 21일 KIA와의 시범경기에서 홈런과 함께 그림 같은 다이빙 캐치로 외야 타구를 잡은 것도 그의 철저한 몸 관리 덕분이었다.
“30대 초반까지 체중이 80㎏ 중반대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몸이 가벼워야 부상이 적고, 피로가 빨리 풀린다는 걸 깨달았다. 서른여섯 살 때부터 서서히 체중을 줄여 지금은 76㎏이다.”
송지만의 유일한 취미는 맛있는 걸 먹는 거다. 하지만 송지만은 프로에서 살아남으려고 유일한 취미마저 버렸다. 아내 김인화 씨는 “살을 빼려고 지독하리만큼 금식을 했다”며 “남편이 너무 야구에만 몰두해 가끔 ‘빵점 아빠’란 생각이 든다”고 가볍게 투정했다.
송지만은 프로 17년 동안 50억 원가량을 벌었다. 착실하게 돈을 모아 앞으로 먹고사는 덴 큰 지장이 없다. 그런데도 악착같이 야구를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세 가지 이유다. 하나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 마흔 살이 넘어도 야구를 잘할 수 있고, 골든글러브도 수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두 번째는 아이들 때문이다. 큰 아이가 초교 6학년, 작은 아이가 4학년이다. 가끔 아이들이 ‘나도 크면 아빠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자기 일에 충실했던 사람으로 비치고 싶다. 퇴물이 돼 은퇴하는 게 아니라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당당하게 유니폼을 벗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마지막은 40, 50대 야구팬들이다. 내가 마흔이 넘어서도 충분히 자기역할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40, 50대 야구팬들도 큰 힘을 받지 않을까 싶다.”
젊었을 때 송지만은 자기를 위해 배트를 들었다. 서른이 넘어서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뛰었다. 이제 그는 그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을 위해 그라운드에 남으려 한다. 송지만이 타석에 서면 40, 50대 야구팬들이 가슴을 졸이며 그를 응원하는 이유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