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간인 불법사찰과 관련해 자신이 총리실 자료 삭제를 지시한 ‘몸통’이라고 주장한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3월 31일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민주주의의 근본을 위협하는 국기문란 사건이다.”
지난 3월 29일 KBS 노조가 2600여 건의 민간인 사찰 자료를 폭로하자 민주통합당은 일제히 공세에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해야 할 시점”(박영선 의원), “미국 워터게이트보다 몇 배의 폭발력이 있는 중대한 범죄”(유재만 변호사) 등과 같은 강경 발언이 줄을 이었다. 현재 민주통합당은 이 문건들을 입수해 정밀 분석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은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가 있느냐. 군사 정권 시절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야권에서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번에 공개된 문건의 내용 때문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1팀이 지난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작성한 이 문건엔 고위 공직자는 물론 정·재계·언론계 등 각계의 인사들을 사찰한 흔적이 담겨 있다. 이세웅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김문식 전 국가시험원장 등 노무현 정부 때 임명된 공기업 임원들도 사찰 대상이었다. 이들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설립한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강정원 전 KB국민은행장 등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이밖에 현역 의원, 대기업 노조, 경찰 간부, 시민단체 대표 등 사찰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공직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첩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수단을 사용한 정황도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지난 2009년 5월 19일에 작성된 문건엔 한 사정기관 고위간부의 불륜 행적이 분 단위로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다음은 그 일부분이다.
‘밤 10시 30분. 차 밖에 선 채로 내연녀와 이야기하다 가볍게 뽀뽀를 하고 헤어질 듯하더니 같이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 ‘계산하려다 내연녀가 맥주 한 병을 떨어뜨려 깨졌다’ ‘고위 간부가 당신 딸에게 뭘 사주지라고 묻자 내연녀는 초콜릿이면 된다고 말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사찰 대상에 대한 미행은 물론 도청까지 했을 수도 있음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들이다. 해당 고위 간부는 문건이 작성된 지 몇 달 후 건강 악화를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KBS 노조 측은 “사찰 문건이 고위 공무원 인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사실 지난 2010년 검찰 수사 때도 각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사찰이 이뤄졌다는 물증이 나왔었다. 검찰이 확보한 공직윤리지원관실 소속 원충연 전 사무관의 수첩엔 여당 의원, 노동계 관계자, 방송국 간부 등의 사찰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김종익 전 KB 한마음 대표 이외에 또 다른 불법 사찰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부실수사라는 비난이 쏟아졌던 이유다. 당시 새누리당 소장파의 한 의원은 “현 정부에선 수사 못한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몸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권이 바뀌어야 민간인 사찰의 실체는 드러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건이 공개된 이상 검찰에서도 이 부분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검찰 수뇌부 역시 사찰 전반에 대한 재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대검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원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증거인멸이나 은폐시도를 밝히는 수준으로는 국민들을 만족시킬 만한 결과를 내기 어렵다. 일단 공개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찰 과정에서 위법성이 있었는지 짚고 넘어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여당인 새누리당도 성역 없는 검찰 수사를 촉구하고 있다. 이상일 새누리당 선대위 대변인은 “단 한 점의 의혹도 남기면 안 될 것이다. 관련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중 처벌해야 할 것”이라면서 “새누리당은 검찰 수사를 예의주시할 것이고, 그 결과가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다른 조치를 강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사찰 내용의 보고라인 규명 여부가 이번 검찰 수사의 핵심 포인트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작성한 보고서는 민정수석실 혹은 이영호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로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공직윤리지원관실 보고서엔 ‘EB’와 ‘민정’이라는 표시란이 있는데, 여기서 EB는 이영호 전 비서관을 뜻한다. 만약 EB에만 체크돼 있다면 민정수석실은 이 보고서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이 전 비서관이 공식 체계를 무시하고 ‘비선라인’을 통해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보고서를 받은 것이다.
야권에선 이 전 비서관은 ‘메신저’에 불과할 뿐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 전 비서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로부터 받은 보고서를 윗선에까지 보고했다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중진 의원은 “사찰 보고서가 박영준 전 차관에게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박 전 차관이 이명박 대통령에게까지 그것을 올렸는지 확인하는 게 관건”이라면서 “정부의 조직적인 증거인멸 시도, 검찰 부실수사 논란 역시 이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거대한 ‘몸통’이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사우나까지 따라 들어갔다”
KBS 노조가 민간인 불법 사찰 문건을 공개한 다음 날인 3월 30일, <일요신문>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근무했던 A 씨와 간략하게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A 씨는 “사찰을 받았던 인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다음은 A 씨와의 일문일답이다.
― KBS 노조가 공개한 문건은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작성한 것 중 극히 일부라고 들었다.
▲ 맞다. 대부분 없앴다. 사찰 문건의 양이 엄청났다. 자료 삭제 작업은 점검2팀이 맡아서 자세한 방법은 모른다.
― 문건을 보면 도청이나 감청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 안했다. 낮에는 주로 망원경으로 살피기도 하고, 밤에는 그냥 행인인 척 따라 붙는다. 가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 여자문제 등 사생활을 사찰한 부분도 많다.
▲ 일단 (사찰) 대상으로 분류되면 세세한 것까지 다 본다. 거기엔 불륜 같은 것도 포함된다. 유흥업소나 골프장 출입도 다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찰 대상자가 사우나에 가면 우리도 같이 들어간다. 그야말로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해 보고를 하는 것이다.
― 보고서는 누구한테 올렸나.
▲ 우리는 팀장(공직윤리지원관실 점검1팀)한테 보고했다. 그게 이영호 전 비서관 혹은 민정수석실로 간다.
― 사찰 대상은 어떻게, 또 누가 정하는지 궁금하다.
▲ 모른다. 주로 BH(청와대)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 BH 하명으로 이뤄진 사찰 비중은 어느 정도 되는지.
▲ 정확히 말하면 이영호 전 비서관 쪽에서 오는 거라고 봐야 한다.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야권에선 이명박 대통령 하야까지 거론하고 있다. 당사자로서 입장은 어떤가.
▲ 물론 죄송스럽다. 특히 사찰을 당했던 인사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다만 우린 공무원으로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