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최고위원은 4·11 총선 이후 정치적 입지를 넓힐 기회를 잡았지만 ‘킹메이커’가 되기 위해선 당내의 ‘박지원 불가론’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지난 4월 20일 민주통합당(민주당) 박지원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이처럼 알쏭달쏭한 얘기를 풀어놨다. 앞서 17일 손학규 상임고문과 오찬회동을 가졌을 때 무슨 얘기를 나눴느냐는 질문을 받고서다. 지난해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것처럼 정적으로 돌아섰던 두 사람의 의미심장한 만남에 대한 대답치고는 싱겁기 그지없다. 손(手)은 잡았지만 손(孫)은 잡지 않았다는, 오랫동안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으로 살았던 그다운 절묘한 정치적 레토릭(수사)이었다.
박 최고위원의 발언 취지는 단순했다. 5월 4일 원내대표 경선, 6월 9일 당대표 경선, 7∼8월 대선후보 경선 등 ‘릴레이 경선’을 앞두고 자신과 손 고문 간의 연대설이 불거지자 “앙금이 풀렸다고 생각하면 금물”이라고 적극 부인한 것이다. 이 정도로는 성에 안 찼는지 그는 “당의 흐름이 어떤 계파의 독식으로 간다면 저도 대권 출마를 고려하겠다” “오직 정권 교체 하나를 위해서는 대권이든 당권이든 무엇이건 제 몸을 던지겠다는 신념이 있다”며 뜬금없이 대권 출마 가능성까지 시사했다. 최근 자신의 행보는 친노(친노무현) 그룹의 독식을 견제하기 위함일 뿐 손 고문 지원과는 무관하다고 재차 강조한 것이다.
이런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민주당 안에도, 밖에도 없을 것 같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손 고문과 다시는 같이 정치하지 않을 것처럼 말했던 그였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손 고문의 만남 제안에 응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박 최고위원이 왜 손 고문과의 회동에 대해 구구절절 쓸데없는 얘기까지 늘어놓으며 설명하려 했을까. 당 관계자들은 “그만큼 박지원의 몸값이 올라갔다는 증거”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민주당 창당과 4·11 국회의원 총선거를 거치면서 호남 정치세력의 소외감과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그 호남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박 최고위원의 행보가 당내 제 세력의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는 얘기다.
이번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한 서울지역 당선자는 “당내 대선주자들의 면면과 역학구도로 볼 때 이번에 호남 출신 대통령이 나오긴 어렵지만 호남의 지원 없이는 당권도, 대권도 있을 수 없다”며 “박 최고위원이 ‘꽃놀이패’를 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자는 “손학규 고문이 친노 후보를 제압하기 위해서도, 문재인 고문 등 친노 후보가 명실상부한 야권 단일후보로 부상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호남을 잡아야 한다”며 “돌려 말하면 박지원을 잡아야 대권을 잡을 수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손 고문과의 연대설은 강하게 부인했지만 박 최고위원은 당분간 비노 세력 규합에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총선 공천과 선거전략 실패 등과 관련해 ‘친노 책임론’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데다 당선자 분포 면에서도 친노그룹이 최대 파벌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손학규계와 관료 출신, 호남·충청 당선자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중도 강화론’이 터져 나오고 있다. 여기에는 친노그룹이 통합진보당, ‘나는 꼼수다’에 휘둘려 다 이긴 선거를 망쳤다는 불만이 깔려 있다. 원내대표 경선과 당대표 경선은 물론 대선후보 경선에서도 이들이 똘똘 뭉치지 않고서는 친노그룹의 막강 파워에 맞서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당내에서 “손학규 고문이나 박지원 최고위원이나 서로가 싫어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박 최고위원의 말처럼 그가 손 고문과 확실한 제휴에 들어갔다고 보기엔 이른 감이 있다. 박 최고위원은 그동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권 교체를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위해 ‘판 메이커’ ‘킹 메이커’가 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이른바 강호의 인재들이 민주당 그늘 아래 모여 경쟁하고, 여기서 이긴 후보가 대선 본선에 나가 정권 교체를 이루는 데 자신이 판을 깔아주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판을 깔고 심판을 봐야 할 사람이 벌써부터 특정 주자의 손을 들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장의 역학구도 상 손 고문 등 비노 세력과 연대하면서 친노그룹의 독주를 견제해야 하겠지만 박 최고위원의 궁극적인 선택지는 ‘될성부른 떡잎’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 최고위원이 기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당내 인사들에게 ‘친노 대통령은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고 밝힌 것은 친노그룹에 대한 엄포성 발언으로 받아들여진다. 박 최고위원의 향후 행보와 관련,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구민주계 인사는 “‘꽃놀이패’를 쥔 사람 입장에선 ‘꿩 잡는 매’를 지원하면 그만일 뿐 ‘매’가 누가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의미심장한 전망을 내놨다. DJ가 말했듯이 정치는 생물과 같아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 지난 3월 26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부산 사상구 선거사무실을 예방한 손학규 전 대표를 만나고 있다. 일요신문DB |
하지만 이른바 ‘박지원 대표 불가론’이 당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 같은 기류는 친노그룹뿐 아니라 486그룹, 손학규계, 수도권 초선 당선자들 사이에도 감지된다. 당의 얼굴로 내세우기엔 박 최고위원에게서 너무 구정치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본인은 대권 도전 의사를 밝히고 있음에도 민주당 내에서 ‘정세균 대표론’이 또 다시 제기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당권을 호남 출신이 쥐되, 그 주인공이 박지원이 돼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박 최고위원 자신이 총선을 패배로 이끈 지도부의 일원이라는 점도 그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다. 김부겸 최고위원은 이미 “총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지도부가 다시 당권에 재도전하는 것은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일갈한 바 있다. 박 최고위원은 정치적 입지를 넓힐 결정적 기회를 잡았지만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고도의 줄타기와 지략 싸움을 벌여야 할 상황인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