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속재산 분쟁을 둘러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사진)과 이맹희 전 회장, 이숙희 씨의 법리 공방이 주목을 끌고 있다. 일요신문 DB |
▲ 이맹희 전 회장. 일요신문DB |
“한푼도 내줄 생각이 없다. 대법원이 아니라 헌법재판소까지라도 가겠다(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건희 회장의) 탐욕이 이번 소송을 초래했다(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선대회장 때 재산분할이 완료되었다는 건 거짓말(이숙희 씨).”
지난 2월 이맹희 전 회장이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상속재산 인도 청구소송을 제기하면서 불거진 삼성가의 상속재산 분쟁이 시간이 갈수록 합의나 중재의 길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조만간 합의할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던 재계에서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보는 이가 더 많아지고 있다. 재계 고위 인사는 “감정싸움으로 치달으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됐다”고 단언했다.
이병철 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재산 때문에 동생들이 다투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중재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손을 놓은 상태나 다름없다. 한솔그룹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섣불리 나서기 곤란하다”며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어느 한 쪽 편을 들기도 힘든 상황이 돼버려 더 말을 아끼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상속문제는 1987년 이미 끝난 일이라는 데 변함은 없다”고 덧붙였지만 처음 문제가 불거졌을 당시 “이건희 회장 편을 든다 해도 어쩔 수 없다”던 입장과는 사뭇 다르다.
“중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던 CJ그룹 측도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 중재가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한 뒤 “중재 노력은 이제 물 건너 간 상태”라고 말했다. 이명희 신세계 명예회장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신세계 측은 “언급이 전혀 없다”며 “형제들 싸움에 끼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전했다.
이번 소송을 맡은 법무법인 화우 측은 “화해나 조정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으며 의뢰인 쪽에서 조정 의견을 내비치거나 조정안에 대해 문의해온 적도 없다”고 밝혔다. 소송을 제기한 쪽이나 소송을 당한 쪽이나 한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얘기다.
이번 소송의 핵심은 상속재산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가 아니라 ‘이병철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에 대한 회복청구권 시효가 소멸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소송을 제기한 쪽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이건희 회장 측은 시효가 소멸했다는 것이다. 지난 4월 27일 이건희 회장 측이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에도 ‘시효가 소멸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병철 창업주의 상속재산 분배 문제는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암자전>에서 삼성문화재단 설립을 결심하며 그는 “사재의 처분을 단행하였다”고 밝힌 바 있다. 문화재단 설립에 주식과 부동산을 출연한 후 남은 재산은 180억 원. 이병철 창업주는 이를 “삼등분했다”며 다음과 같이 밝혔다.
“180억 원 중 60억 원을 삼성문화재단에 추가 출연하고, 다음 60억 원은 가족과 삼성그룹 유공사원에게 주식으로 배분했다. 그리고 나머지 60억 원에서 10억 원은 사원공제조합기금으로 기증하고, 50억 원은 일단 내가 보관했다가 후일에 다시 유익한 사용방도를 강구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누구에게 어떤 주식을 주었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다. 다만 이건희 회장 쪽에서도 인정하듯 장남인 이맹희 전 회장에게는 주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비록 이병철 창업주가 이맹희 전 회장에게 재산을 상속해주지는 않았지만 부인 손복남 씨에게 안국화재 주식을, 아들 이재현 CJ그룹 회장에게 제일제당 주식과 경영권을 주었는데 이것이 이맹희 전 회장에게 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해석이 있다.
그렇지만 이번 소송의 핵심은 삼성생명·삼성전자 차명주식이다. 이맹희 전 회장이나 이숙희 씨 등은 차명재산에 대해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즉 ‘별도의 상속재산’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며 그렇다면 자신들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얘기다. 앞서 언급한 구체적인 동산·주식·경영권 등에 대한 분배를 제외하고, 이병철 창업주가 차명주식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분배해주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반면 이건희 회장 측은 차명재산은 이미 형제들의 협의로 이건희 회장에게 권리가 넘어갔다고 주장한다. 설사 이를 부인하더라도 유류분반환청구권의 시효가 지났으니 이건희 회장이 소유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논리다.
여기서 중요한 시점은 1987년이다. 이건희 회장 측은 “1987년에 재산 분배는 끝났다”고 주장하고 있고 이맹희 전 회장과 이숙희 씨 측은 차명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협의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대체 1987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87년 1월 이병철 회장은 일본으로 장녀 이인희 한솔 고문, 차남 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 3남 이건희 회장, 5녀 이명희 신세계 명예회장, 그리고 이재현 회장을 불렀다. 장남인 이맹희 전 회장 대신 장손인 이재현 회장을 부른 것이다.
여기서 이병철 회장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모두 분배해주었으며 형제간 협의도 마쳤다는 것이 이건희 회장 쪽 주장이다. 반면 이맹희 전 회장과 이숙희 씨 주장은 ‘그런 적 없다’는 것. 1987년 일본에 형제들이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재산 분배에 대한 협의는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창업주가 삼성그룹 후계와 관련해 다른 말을 했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선대회장의 유언장도 없고, 이 자리에서 형제간 협의한다는 협의서도 없는 실정이어서 어쩌면 다툼이 불가피할지 모른다. 1987년의 상황은 당시 참석한 사람만 알고 있다. 이건희 회장과 이인희 고문은 참석했고, 이맹희 전 회장과 이숙희 씨는 참석하지 못했다. 다만 이맹희 전 회장의 아들 이재현 회장이 참석했다. 재계 일각에서 이재현 회장을 주목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재현 회장은 뭔가 알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건희 회장 쪽은 1987년 당시 자리에 있었고 선대회장에게 직접 ‘구두’로 전해 들었다는 점이 유리한 부분이다. 여기에 이인희 고문까지 힘을 실어줬다. 반면 소송을 제기한 사람들은 당시 자리에 없었다는 것이 께름칙한 부분이지만 이재현 회장이 참석했고, 유언장과 협의서가 없다는 점이 유리하다.
1987년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이번 소송의 핵심인 ‘시효’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상속회복청구권 시효는 10년. 즉 상속된 것을 안 지 10년이 지나면 시효가 소멸된다. 이건희 회장 측이 시효가 소멸됐다고 주장하는 이유도 1987년에 상속재산 분배가 끝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또 이건희 회장 측은 상속권의 침해 사실을 안 지 3년이 지나면 제척기간(어떤 권리에 대해 법률상으로 정해진 존속기간, 소멸시효와 비슷한 개념)이 경과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설사 공동상속인들이 1987년에 형제간 협의한 사항을 부인하더라도 2008년 삼성특검 때 차명재산이 창업주의 상속재산임이 밝혀졌기에 공동상속인들이 상속권 침해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간주, 제척기간이 지났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소송을 제기한 쪽은 비록 2008년에 차명재산이 선대회장의 상속재산이라는 것을 처음 알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상속권이 침해당한 사실은 2011년 6월에 알았으므로 상속권회복청구권 시효가 지나지 않았음은 물론 3년의 제척기간 역시 경과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맹희 전 회장 등은 2011년 6월 이건희 회장이 보내온 ‘상속재산 분할 관련 소명’이라는 문서를 본 후에야 비로소 차명재산이 공동상속인, 즉 형제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 상속재산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것이다.
▲ 1965년 찍은 가족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숙희 씨, 이인희 고문, 고 이병철 명예회장, 고 박두을 여사. 사진출처=이병철 명예회장 전기 <담담여수> |
양쪽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이번 소송은 결국 본격적으로 불이 붙고 있다. 진위 여부를 떠나 이번 소송은 삼성과 이건희 회장, 나아가 우리나라 이미지를 훼손시키고 있다. 벌써 주요 외신들은 삼성가의 재산 다툼을 비아냥거리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삼성의 재산 분쟁을 ‘한국의 통속드라마’에 비유했다. 또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번 사건이 삼성 이미지를 실추시킬 것을 지적하며 우리나라 재벌의 족벌경영의 문제점도 거론했다.
이렇게 파문이 커지는 상황에서 삼성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과 같은 톤으로 이맹희·숙희 씨를 비난하면서도 “공식 입장은 없다”고만 밝히고 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