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문 고문은 박지원 의원이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돼 최악의 상황은 일단 피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박 의원마저 패배했을 경우 대권도전은 사실상 끝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의원이 ‘이-박 연대’의 1차 관문을 통과해 어느 정도의 충격은 덜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문 고문은 앞으로가 첩첩산중이다. 여전히 당내에는 ‘이-박 연대’를 지지한 문 고문을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대권주자’로 보는 시각이 상존하고 있다. 여기에다 담합 논란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이해찬-박지원’이 만든 프레임에 가둬버렸던 것도 큰 문제다. 문재인의 대권도전은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이해찬-박지원 연대’는 애초 양 계파 수장의 ‘과욕’이 부른 일종의 야합이었다. 자신들이 아니면 현재의 민주통합당 위기를 수습할 수 없다는 오만의 결과였다. 일각에서는 “선거 전 계파 간 물밑 교섭은 정치의 기본”이라며 양측의 ‘담합’을 선의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 연대의 경우 계파 구성원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상층부간의 막후교섭’의 형태로 불거지면서 논란이 커지게 된 측면이 있다.
서울소재 한 대학교수는 이에 대해 “이번 논란은 정치적 연대라는 틀 속에서 보기보다 민주적 절차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에서 접근해야 한다. 양 계파 수장이 전체 의원들은 아니더라도 사전에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순서였다. 그런 절차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대표-원내대표 경선에 대권주자 연계설까지 거론되니 밀실야합이라는 말을 듣는 것 아니겠느냐. 더구나 민주적 가치를 당의 최대 목표로 삼고 있는 민주당에서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일갈했다.
▲ 지난 4일 통합민주당 원내대표 선출선거에서 투표를 마친 이해찬 전 총리가 박지원 원내대표와 인사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그런데 문재인 고문이 이-박 연대 파문이 터진 초반에 더 큰 불을 지른 것이 화근이 됐다. 문 고문 역시 대선을 위해선 ‘충청(이해찬)-호남(박지원)’ 구도에 영남 대권주자가 필승카드라는 데 인식을 같이 해 이-박 연대를 지지했을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고문은 ‘구태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새로운 대권주자다. 그런 그가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밀실야합에 손을 들어줬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다. 이는 현실정치를 고려하기 이전에 국민들의 정서를 건드리는 미숙한 정무적 판단이었다. 선수가 심판을 뽑는 데 개입했다는 간단명료한 메시지에 문 고문의 스탠스는 급격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문제는 문 고문이 대선 정국을 앞두고 끊임없이 이-박 연대 논란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것은 그의 대권가도에 중대한 원죄가 될 수도 있다. 유력 주자인 문재인 고문이 ‘예상 외로’ 이-박 연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 후 대선 후보로서의 존재감이 급격히 떨어졌다. 그 뒤 문 고문은 파문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상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문 고문 본인도 이를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이에 대해 “문 고문이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출해도 부족할 판에 각본에 짜인 기득권 세력의 ‘호남 원내대표, 충청 당 대표, 영남 대통령’ 프레임에 완전히 갇혀 버렸다. 앞으로 문 고문이 유력한 대선주자로서 초 계파적인 행보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든, 어떤 제스처를 취하든 이제는 이-박 연대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비쳐지지 않겠느냐. 박지원 의원이 원내대표가 돼 최악의 상황은 막았지만 앞으로도 진퇴양난이 계속될 것이다. 결국 문 고문이 스스로 옭아맨 이-박 연대의 프레임을 풀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민주당 내부에서는 박지원 의원의 원내대표 당선으로 ‘이해찬 전 총리가 과연 이-박 합의대로 당 대표에 출마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박 신임 원내대표가 ‘대선 후보 경선 중립’을 선언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또한 이 전 총리의 당 대표 출마로 밀실야합의 ‘결정판’이 만들어진다면 문재인 고문에게는 ‘기득권의 밀실야합 동조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이는 그의 대권가도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당 일각에서는 문 고문이 이-박 연대의 주술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이해찬 의원의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친노에 속한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단합이든 담합이든 당내 경선에서 연대는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떠들면서 진행하는 연대가 어디 있느냐. 양 계파 수장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결과”라며 “이해찬 전 총리의 카드는 사실상 사라졌다. 문재인 고문을 조금이라도 위한다면 지금이라도 당 내부 결속을 위해 이 전 총리가 자기희생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 전 총리의 한 측근은 “원래 의도했던 것과 달리 곡해된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다”며 “정권 창출을 어떻게 하느냐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기 때문에 당 대표 출마 부분은 이 전 총리가 현실 조건들을 종합한 뒤 합리적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고문 측 관계자들도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문재인 고문은 최근 이해찬-박지원 합의 직후 문성근 대표 권한대행과 만나 당 안팎의 비판여론을 수렴하고 추후 대응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 대표실 한 관계자는 “문성근 대표가 이-박 합의에 대해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전하고 이에 대한 국민적 비판과 반감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의견 표명을 해야 한다고 전했다”며 “박지원 원내대표까지는 인정하더라도 그 이상 나가는 것은 당을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견해를 밝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박 합의가 실제로 나타날 경우 문 고문이 입을 피해가 생각 밖으로 클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문재인 고문은 원내대표 경선 이후 이해찬 전 총리의 당 대표 경선 출마를 만류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통합당 전략국 한 관계자는 “문재인 고문이 혹시라도 대선 가도에 악영향을 받으면 민주당으로서 여간 힘들어지는 게 아니다”며 “현 국면에서 이해찬 전 총리의 당 대표 불출마만이 당을 추슬러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대안”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고문은 비록 총선에서 정치 초년병의 미숙함을 보여주며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고 대선 가도에 완전히 빨간불이 켜진 것은 아니었다.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패배주의에 빠진 민주당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손학규 정동영 정세균 등 기존 대권주자들보다 신선하다는 것을 무기로 당을 대선 총력전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하지만 그 스스로 밀실야합이라는 구태정치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이로 인해 문 고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신선하고 깨끗한 이미지가 상당부분 훼손됐다는 평가가 많다. 이 사슬을 끊는 유일한 길은 문재인만이 내세울 수 있는 ‘새로운 국민공감 정치’를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는 게 중론이다.
고진동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