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위해 ‘악마’와 손잡는 정치 초년생 ‘해웅’역 맡아…“헤어나오기 가장 어려웠던 캐릭터”
“해웅을 연기할 때 진짜 고민이 많았어요. 이 캐릭터가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지, 그런 고민은 아니었고요. 아예 그냥 ‘얜 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 이런 느낌이었죠. 이렇게까지 해야 해?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거지? 이 지점이 정말 고민되더라고요. 그런데 해웅이가 선택한 길을 또 멈출 수는 없는 거거든요. 속으론 ‘얘 행동이 이게 맞나’ 생각하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그럼 어떡해. 그냥 죽어? 살아야 할 것 아냐’ 하고 적반하장 하는 게 보여야 하니까요(웃음). 그래서 연기하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굉장히 많이 던졌던 기억이 나요.”
3월 1일 개봉하는 영화 '대외비'는 돈, 권력, 명예, 각자의 욕망을 위해 위험한 거래를 시작하는 세 남자의 배신과 음모를 그린 작품이다. 1992년 부산을 배경으로 만년 국회의원 후보인 해웅(조진웅 분)과 정치판의 숨은 실세 순태(이성민 분), 행동파 조폭 필도(김무열 분)가 대한민국을 뒤흔들 비밀문서를 손에 쥐고 판을 뒤집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쟁탈전이 영화의 토대를 이룬다. 조진웅이 맡은 해웅은 자신이 나고 자란 부산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믿었던 순태에게 버림받고, 제자리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악마'와의 계약도 서슴없이 하겠다며 몸부림치는 인물이다.
“해웅이는 한 발짝만 뒤로 가면 떨어지는 상황이죠. 저 같았으면 그 전에 먼저 수긍하고 빨리 숙였을 건데(웃음), 해웅이는 너무 험난한 길을 선택한 거예요. 촬영할 때도 그랬어요. 저 같으면 벌써 무릎 꿇고 아예 정치 쪽은 들여다보지도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난 이런 딜을 한 적이 없나.’ 극한의 상황이 아니더라도 좀 더 쉬운 길을 택하려 했던 적이 없었나.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앞으로는 어떻게 현명하게 굴어야 할까. 영화를 딱 보니까 이런 질문을 너무 아프게 꼬집는 것 같아서 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 씁쓸한 기분도 느끼고 그렇더라고요.”
조진웅의 말대로 그가 연기한 해웅은 벼랑 끝에 내몰린 생쥐면서도 고양이가 아닌 호랑이를 향해 마지막 발톱을 드러내는, 배짱이 좋다면 좋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물러설 곳이 없는 그는 자신의 정치 스승이자 동시에 원수가 된 순태를 향해 국회의원 공천을 놓고 이길 수 없는 ‘딜’을 걸게 된다. 배경인 부산은 물론이고 서울의 ‘높으신 분’과도 직통으로 연결되는 숨은 권력자 순태에겐 바위에 계란 치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판사판을 벌이는 셈이다. 둘 사이의 전사는 극 중에서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조진웅은 “해웅은 해운대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고, 순태의 눈에 들어 온갖 궂은일을 다 봐주다가 팽 당한 인물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해웅의 서브텍스트(대사로 표현되지 않은 캐릭터의 생각, 느낌, 판단 등)를 많이 고민했는데 사실 그의 과거를 많이 고민하지 않아도 됐던 것 같아요. 극 중에서 해웅이 순태에게 ‘내가 몇 년을 당신 똥을 닦아줬는데’라고 하잖아요? 그 말만으로 이 인물의 전사가 보이는 거예요. 아마 순태가 키운 사람일 거고, 순태가 국회의원일 때 보좌진을 맡기도 했었겠죠. 앞에선 ‘네, 네 어르신’하면서 무슨 일이든 다 처리해주다가 이 바닥의 생리를 알게 되고…. 순태 말을 잘 들어서 이제 의원이 될 일만 남았는데 까불다가 팽 당한 거죠(웃음).”
중반부부터 확연히 날 선 대립을 보이는 해웅과 순태의 맞대결 신 중에서 조진웅이 꼽은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은 국밥집에서의 독대 신이라고 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에, 성공 가능성도 희박한 딜을 걸고, 태산 같은 카리스마를 지닌 권력자 앞에서 평정을 가장하지만 폭포수 같은 땀은 숨길 수 없는 장면이었다. “여름에 찍느라 땀이 너무 나서 죽는 줄 알았다”며 혀를 내둘렀지만 그럼에도 그 땀이야말로 신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준 1등 공신이었다는 게 조진웅의 이야기다.
“땀나는 건 진짜 괴로웠죠.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 신에서 땀을 그대로 내버려 둬야 순태와 해웅 간의 이 긴장감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굳이 안 닦았어요(웃음). 서로 죽여야 하는데 저쪽은 권총을 들고 있는 반면 나는 칼을 들고 있는, 애초에 싸움이 아예 안 되는 게임 중인 거거든요. 그런데 그 안에서 해웅이가 딜을 걸잖아요? 어떻게 해서든 살 구멍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긴장감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그 신을 함께 한 순태 역의 이성민을 “역시가 역시”라며 치켜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화로만 따져도 ‘군도: 민란의 시대’(2014), ‘보안관’(2017), ‘공작’(2018)까지 굵직한 작품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이성민의 연기력은 명불허전이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가장 가까이에서 이성민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조진웅이 자랑할 수 있는 축복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주고받다 보니 에너지의 총합이 더 커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까지 서로의 캐릭터가 어떤 에너지를 가졌는지를 너무 잘 아니까요. 극 중에서 순태도 해웅을 너무 잘 알겠지만, 해웅도 순태를 잘 알거든요. 그러니 순태에게 딜을 거는 거겠죠. 너무 잘 아니까 ‘개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이)성민이 형과 많은 작품을 했는데도 현장에서만 볼 수 있는 디테일이 보이기 시작하면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제가 제일 가까운 데서, 제일 먼저 보는 거잖아요(웃음).”
좋은 배우들, 훌륭한 제작진과의 합으로 이뤄낸 작품은 시사 후까지 조진웅에게 많은 생각을 남겼다. 작품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캐릭터로부터 헤어나오려 한다는 그가 최근 들어 가장 힘들게 지워낸 캐릭터도 해웅이었다고 했다. 꽤 오랜 시간 해웅을 떠올리는 게 습관이 됐었다는 조진웅은 “그래도 그런 고민들이 괴롭다거나 힘들진 않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음 작품을 위한 긍정적인 압박이었고, 새로운 추진력이 됐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아마 해웅이를 연기하며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던져서 끝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기억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연기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건 또 아니거든요(웃음). 촬영장에서 저는 굉장히 즐거웠어요. 제가 표현해 내고, 사람들과 협연하고 그런 게 항상 즐거워요. 신명나게 몇 시간 놀면 벌써 끝나있고 그렇거든요. 나중에라도 ‘아유, 내가 잘한 건가’ 하지 않고 그저 ‘잘 놀았다. 이제 소주 한잔 하러 가자, 다 털어내고!’ 하게 돼요. 그렇게 빨리 안 벗어나면 다음 작품이 안 들어오기도 하니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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