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박찬호와 아는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메이저리그에서 100승 이상을 거둔 대투수라는 건 잘 알고 있다.” SK 외국인 투수 아퀼리노 로페즈는 박찬호의 한화 입단 소식을 듣고 그렇게 말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29승을 거둔 로페즈는 메이저리그에선 통산 6승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메이저리그 통산 124승에 빛나는 박찬호는 어쩌면 로페즈에겐 우상일지 몰랐다.
로페즈는 박찬호의 예상 승수를 묻는 말에 “잘 모르겠다”면서도 “빅리그 출신답게 좋은 성적을 올릴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범경기에선 로페즈의 예상이 빗나갔다. 박찬호는 등판할 때마다 대량점수를 내주며 강판당하기 일쑤였다. 한화 한대화 감독이 박찬호의 선발진 포함을 두고 장고를 거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찬호는 “막상 시즌이 시작하면 다를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결국, 박찬호의 자신감이 맞았다. 박찬호는 4월 12일 청주 두산전에서 6⅓이닝 동안 3실점하고 시즌 첫승을 따낸 이후 5월 5일 삼성전까지 1승2패 평균자책 3.25를 기록 중이다. 5번의 선발등판에서 퀄리티스타트(6이닝 3실점 이하)가 3번이나 된다. 선발투수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뜻이다.
한 감독은 “류현진이 고군분투하는 선발진에 박찬호가 없었다면 팀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라며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키는 마흔 살 투수에게 경의를 표했다.
#후배들에 미치는 영향
박찬호가 한화에 미치는 영향은 비단 팀 성적만이 아니다. 한화의 젊은 투수들에게 박찬호는 가장 든든한 조언자이자 교과서다.
스프링캠프 기간 중 박찬호는 후배 김혁민에게 공격적인 투구를 강조했다. “유인구로 도망가는 것보다 초구부터 속구를 던져 스트라이크를 잡아야 타자와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고 누차 조언했다. 지난해 김혁민은 이닝당 투구수 16.7개로 ‘리그에서 가장 공을 많이 던지는 투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하지만, 박찬호의 조언을 받아들이고선 확 달라졌다. 올 시즌 김혁민의 이닝당 투구수는 16.0개로 지난해에 비해 0.7개나 떨어졌다. 가뜩이나 신중한 투구가 요구되는 구원투수로 등판했음에도 투구수가 낮아졌다는 건 그만큼 공격적인 투수로 변신했다는 의미였다. 김혁민은 5월 9일 현재 2승1패 평균자책 1.83으로 한화 불펜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다.
▲ 양훈과 김혁민. |
안승민은 “투구 밸런스를 잃은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박찬호 선배의 영향과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안승민은 “스프링캠프에서 너무 일찍 페이스가 올라온 게 문제였다”며 “정규 시즌이 시작하고 갑자기 투구 밸런스가 무너지며 특유의 코너워크가 되지 않은 게 부진의 원인”이라고 밝혔다.
정 코치도 “세간에서 제기하는 지적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박찬호가 젊은 투수들에게 성심성의껏 조언하는 건 맞다. 그러나 이는 베테랑의 일반적인 조언이지, 코칭은 아니다. 투수들도 한용덕 투수코치와 내 지도를 따르고 있다. 시즌 초반 팀 성적이 좋지 않다보니 많은 우려와 걱정이 제기되는 건 이해하지만, 박찬호는 선수로서 온 힘을 다하고, 선배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며 이른바 박찬호 책임론을 부정했다.
한 감독 역시 정 코치와 같은 생각이었다. “(박)찬호는 빅리그 출신답지 않게 매우 겸손하다. 코칭스태프의 말도 잘 따른다. 한 번은 ‘투구 간격이 빠른 게 오히려 체력적 부담을 가중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저는 빠른 투구 간격이 편하지만, 감독님이 그렇게 보셨다면 생각을 달리 해보도록 하겠다’며 수용 의사를 밝혔다. 후배들에게 조언하는 것도 대부분 ‘메이저리그에선 이렇게 하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식이 아니라 미국야구 경험담을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는 정도다. 박찬호가 팀에 주는 효과는 긍정적이면 긍정적이지, 부정적인 건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포수 신경현과 이야기 나누고 있는 박찬호.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
시범경기 때만 해도 박찬호는 주변의 조언을 받아들인 듯했다. 경기 외적인 질문엔 가능한 말을 아꼈다. 그러나 정규 시즌이 시작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박찬호는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가운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발언도 꽤 많았다.
시즌 첫 번째 등판이었던 4월 12일 두산전을 끝내고 박찬호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기록에 나오지 않는 도루와 사인 훔치기, 투구 습관을 알아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나’하는 생각을 해봤다”며 “미국에서도 그런 선수들이 있지만, 많은 선수가 (그렇게 경기 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사인 훔치기는 대표적인 비신사적 플레이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한다. 이는 한국 프로야구도 같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시도되면서도 외부로 알려지는 걸 극도로 꺼린다. 그러나 투수의 투구 습관을 알아내는 건 그렇지 않다. 전력분석의 일환으로 여긴다. 지난해 박찬호가 잠시 몸담았던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투구 습관 포착은 구단 전력분석팀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다. 따지고 보면 투구 습관 포착을 가장 먼저 한 곳도 메이저리그다. 마지막 4할 타자 테드 윌리암스는 투수의 투구 습관을 알아내 어느 구종을 던질지 예측해 안타를 뽑아냈던 선수였다. 모 야구해설가는 “박찬호의 발언이 한국 프로야구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 건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아시아 야구의 차이일 뿐”이라며 “박찬호가 아직까지 빅리그 중심으로 아시아 야구를 이해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박찬호의 심판진에 대한 불만제기도 한동안 이슈가 됐다. 5월 5일 대구 삼성전에 선발등판한 박찬호는 팀이 0 대 2로 뒤진 4회 말 1사 2, 3루 김상수 타석 때 보크를 범했다. 투구 준비 중에 글러브에 있던 공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결국 보크로 3루주자 배영섭이 득점하며 박찬호는 3실점을 하고 만다.
보크가 선언되자 박찬호는 “포수 사인을 보고 있던 것도 아니고, 투구 동작 시작 전이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며 구심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박찬호의 항의는 수용되지 않았다. 구심은 “공식 야구규칙에 8.05항 보크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투수판에 중심 발을 대고 있는 투수가 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공을 떨어뜨렸을 경우 보크를 선언하게 돼 있다”며 보크 판정에 이상이 없음을 설명했다.
경기가 끝나고서도 박찬호는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음날엔 아예 “한국 심판은 판정에 일관성이 없다”며 가시 돋친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박찬호는 사흘이 지나고서 “경험이 없었고, 확실하지 않아 애매한 부분이 있었는데 구심의 심판이 정확했다”며 보크를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박찬호는 사흘이 지나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인정한 걸까.
박찬호는 “토미 라소다(전 LA 다저스 감독)에게 문의했는데 보크가 맞다더라”는 말로 라소다의 조언이 보크 수긍의 이유임을 밝혔다.
박찬호의 발언을 듣고 심판들은 “뒤늦게라도 수긍한다니 다행”이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러나 모 심판은 “한국 심판의 보크 판정엔 그렇게 격렬히 항의하더니 자신이 모시던 빅리그 감독의 한마디에 순순히 보크를 인정하는 게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며 “박찬호는 아직도 자신이 빅리그에서 뛰는 줄 아는 것 같다”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박찬호의 과감한 발언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박찬호는 삼성전이 끝나고서 선수들의 예의와 배려심 부족에 대해 꼬집기도 했다.
“한국은 선수들 간의 예의와 배려가 좀 부족한 것 같다. 나는 내 방식대로 투구했는데, 삼성의 어떤 선수가 자꾸 타석을 벗어났다. 고의로 투구 리듬을 뺏으려는 것 같았다. 투수 배려 차원에서 빨리 타석에 들어서야 했다.”
박찬호는 빠른 투구 간격으로 유명하다. 포수에게서 공을 전달받으면 지체 없이 던진다. 타자와의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타자 입장에선 다르다. 박찬호와 상대한 모 타자는 “원체 투구 간격이 짧다 보니 ‘다음엔 어떤 공을 던질까’ 하는 수 싸움할 시간조차 없다”고 털어놨다. 덧붙여 “코칭스태프로부터 박찬호의 투구타이밍에 끌려가지 말고, 기존 타이밍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들었다”며 “그래서 심판의 허락을 받고 타석에서 한 번 벗어난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타자는 “박찬호 선배가 빠른 투구 간격으로 타자와 상대하는 것도 고의로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빼앗으려는 게 아니냐”며 “타자가 자신의 타이밍을 유지하려고 타석에서 잠시 벗어난 것을 무례라고 표현하는 건 지나친 자기중심적 사고 같다”고 지적했다.
#의미 있는 야구 인프라 발언
박찬호의 발언을 두고 야구인들의 입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대체적으로 박찬호의 야구 인프라 문제제기에 대해선 전체 야구인이 고마워하는 눈치다. 실제로 박찬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낙후된 한국야구 인프라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있다. 모자에 ‘끊임없이 참고 견디자. 이놈에 환경’이라는 문구를 적었을 정도다.
박찬호는 “시설이 열악해 선수들의 부상이 우려된다. 경기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국내 최고 야구장이라는 잠실조차 제대로 된 원정 라커룸이 없어 복도에 장비를 놓아 둔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최고의 야구 환경이 갖춰진 미국과 일본에서 뛰던 박찬호의 눈에 국내 구장은 마이너리그 구장만도 못한 게 사실이다. 마이너리그 구장은 고사하고 웬만한 미국대학 구장보다 떨어진다. 특히나 박찬호가 시즌 초 뛰었던 청주구장은 대구구장과 함께 최악의 구장으로 꼽힌다.
박찬호의 지인은 “웬만하면 (박)찬호가 구장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전국민의 영웅들인 프로야구 1군 선수들이 제대로 된 라커룸이 없어 복도에서 옷을 갈아입고, 식사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라며 “다른 선수들이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을 찬호가 총대를 메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