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홍석 9단. |
<장면 A>는 백홍석 9단이 5월 9일 후야오위 8단에게 이긴 바둑이다. 백 9단이 백이다. 백 9단은 유명한 싸움꾼이고, 후야오위 8단은 견실 침착 인내로 정평이 나 있는 기사. 어찌나 튼튼하게 두는지 웬만한 상대는 제풀에 떨어지곤 한다. 이 바둑도 그랬다. 우하귀 일대 흑의 실리가 돋보이고 있다. 백1, 3으로 백도 좌변에 집을 짓고 있는 장면. 흑4가 기민했다. 흑4 자리는 백의 권리였다. 여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백이 아무 때나 선수할 수 있던 곳인데, 백이 잠깐 방심하는 사이 역으로 해 버린 것. 안팎 2집이다. 백이 “괜히 아꼈다”고 후회한 대목이다.
우상귀 흑8 자리도 백이 선수할 수 있었던 곳. 그러나 이쪽은 <1도>와 같은 끝내기가 여전히 남아 있어 백으로서 생각보다 그렇게 아픈 곳은 아니었으며, 곧 보게 되듯이 흑8 자리를 선수하지 않은 것이 결과적으로 역전의 발판이 된다.
<1도> 백1로 키우는 것이 끝내기 요령. 흑2를 기다려 백3 젖히고 흑은 A로 받아 일단락인데, 흑은 A로 받지 않았다. 후수가 싫었던 모양인지. 흑은 다른 곳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끝내기를 했고, 백은….
<2도> 1, 3을 차지했다. 그리고 백5. 흑에게 백 자리에 두어 딱 2집 내고 살아라고 강요한 것. 이게 후야오위의 신경을 긁었다. 자기 집을 메우며 산다는 것, 우리 같은 아마추어도 약이 오르는 일인데, 프로야 더할 것. 자존심이 있지. 흑은 자리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이기는 바둑이다.
<3도> 흑1, 3으로 뭔가 ‘프로다움’을 모색한 것이 이를테면 ‘프로의 맹점’이랄까, 그런 것이었다. 백은 물실호기, 4를 선수하고 6으로 치중! 통렬한 센터링. 만화 같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4도> 백10까지 우상귀 흑 대마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아마추어의 대마는 쫓기다 수가 없어 잡히지만 프로의 대마는 이렇듯 자존심 때문에 죽는데, 지금은 자존심의 대가가 너무 컸다.
후야오위는 수읽기가 깊고 정확하기로도 알아주는 기사. 가령 <장면 B> 같은 기보가 있다. BC카드배 전에 있었던 LG배 세계기왕전 예선에서 둔 바둑이다. 상대는 조훈현 9단. 조 9단이 흑이다.
예선전 대국이라 자세하게 보도가 되지 않았는데, 그냥 지나가기에는 아까워 소개한다. 후야오위가 백1로 좌변을 구축하자 흑은 2로 날아가 붙여놓고 4의 곳을 끼워 백 대마를 차단했다. 상변에서 중앙으로 흘러나온 백 대마를 노리는 것. 흑2는 대마 사냥을 위한 성동격서였다.
<1도> 백1로 우변 대마가 살아가자 흑2부터 다시 본격적인 성동격서인데, 백3, 5, 7로 시간을 벌면서 생각하더니 11, 13으로 버텼다. 잡을 테면 잡아 보라.
<2도> 조 9단이 마침내 칼을 뽑았다. 흑3~9, 격렬한 추궁이다.
<3도> 백1, 3에는 흑4가 급소 일격. 백7, 9도 혼신의 저항.
<4도> 흑1로, 선수로 끊고 3으로 차렷! 필살의 의지에 바둑판이 요동치는 순간이다. 당시 검토실에선 “백 대마가 잡힌 것 같다”고 했다. 백8 마늘모로 나올 때 흑9 날일자로 가로막는 장면에서는 모두들 “백 대마가 갔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부터 후야오위가 수읽기가 불을 뿜는다.
<5도> 백1로 붙이고, 3으로 이단젖혀 끼워 간 것이 정말 보기 힘든, 생각하기 어려운 묘수. 백5로 뛰어붙인 것도 정교한 수. 그리고 7로 따내 버린 것이 또한 기막힌 마무리. 백1, 3, 5, 7 전부가, 한 수 한 수가 묘착이었고, 묘수 시리즈 작렬이었다. 흑의 응수가 끊겼다.
<6도> 흑1로 따내면 백2 건너붙임이 있다. 잡으러 간 위쪽 흑돌들이 거꾸로 잡힌다. 흑이 백2를 방비하면 백은 1 자리에 잇고 A와 B를 맞본다. 흑도 끊기는 것이고 끊기면 수상전은 흑이 안 된다.
엄청난 수읽기. 검토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후야오위가 백홍석과의 대국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대마를 잃었다. 아니, 이번에도 살 자신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던 것.
이광구 바둑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