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대사관 앞에서 탈북청소년들이 탈북자를 북송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일요신문DB |
왜 중국은 무리하게 김 씨를 강제 구금한 것일까. 또한 북한이 중국에 수사를 의뢰했다면 북한이 ‘김영환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김영환 강제 구금 사태에 숨겨진 내막을 자세히 파헤쳐봤다.
기자는 지난 5월 16일 ‘김영환석방대책위원회(대책위)’ 최홍재 대변인을 직접 찾았다. 최 대변인은 지난 과거 NL계열 운동에 몸담았다가 사상을 전향한 인사로 김영환 씨와 함께 호형호제하며 북한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다.
최 대변인에 따르면 김 씨는 지난 3월 23일 중국에 입국했으며 같은 달 29일 귀국길에 오르기 직전에 대련 공항에서 ‘국가안전위해죄’ 명목으로 중국 공안에 긴급 체포됐다. 김 씨와 함께 유재길(44), 강신삼(42), 이상용(32) 씨 등 한국인 3명도 같은 죄목으로 대련 도심에서 긴급 체포됐다.
그런데 체포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현재까지 김 씨를 수사하고 구금하고 있는 단동수사국은 변호인과 가족 접견을 거부하고 있고, 영사 접견도 지난 4월 26일 단 1회밖에 허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 이외에 함께 체포된 유 씨 등 한국인 3명의 경우 현재 어디에 구금된지조차 파악이 안 되고 있는 상태다. 수사국은 “김영환 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3명은 영사 접견을 스스로 포기했다”며 한국 영사관에 영사 접견 포기각서를 보내온 상태다.
구금된 지 50일이 넘도록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최 대변인은 “우리가 김 씨의 구금을 파악한 것은 4월 5일이었다. 우선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가족들이 부담스러워했다. 영사차원에서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현지 영사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해결이 잘 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밝힐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김 씨가 체류기간 동안 중국 내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최 대변인은 “김 씨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몸담고 있지만 중국 내에서 하고 있는 활동은 우리도 잘 모른다. 체류기간 동안 어떤 활동을 했는지 우리도 의문이다. 다만 우리가 듣기로 김 씨가 단동에 머무를 때 신변의 위협을 감지해 혼숙을 피했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스터리 투성이다. 과거에도 한국인이 중국에 구금된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이번 케이스는 과거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특히 이번 사태에는 중국 외에 북한 당국이 개입됐다는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는 실정이다.
최 대변인은 크게 세 가지 이유로 북한 개입설을 제기했다. 가장 먼저 김 씨가 체포된 죄목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김 씨는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중국의 개혁개방노선에 대해 높게 평가했던 사람이다. 중국을 부정하거나 전복시킬 생각이 있기는커녕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역할에 대해 기대감도 높았고 낙관적으로 전망해왔다. 그런데 중국이 무리해서 김 씨를 국가안전위해죄로 체포했다는 것은 김 씨를 의식하고 있는 제3자, 즉 북한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중국 당국이 김 씨를 대련에서 체포해 북한과 인접한 국경도시 단동으로 보냈다는 점이다. 최 대변인은 “김 씨는 대련 공항에서 체포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북한과 인접한 단동의 수사국으로 넘겨졌다는 것이다. 요녕성의 국가안전청 본부는 대도시 심양에 있다. 이동을 했다면 심양으로 했어야 한다. 단동은 체포지인 대련보다도 작은 도시다. 북한 당국과 통신하며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지리적 요건을 갖춘 곳이다. 북한 당국과 현지 중국 공안의 수사협조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고 개입할 여지도 높다”라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체포 이후 보여준 중국 당국의 파행적 행태다. 최 대변인은 “현재까지 보여준 중국 당국의 행태는 비정상적이다. 그 이전에도 중국 당국에 구금된 케이스는 있었지만 면회와 접견을 막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 당국은 기본적인 변호사 및 가족 접견까지 차단하고 있다. 나머지 한국인 3명은 신변조차 파악이 안 된다. 스스로 영사 접견 포기각서를 작성했다는데 고문 등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을가능성이 높다. 특히 이번 케이스는 중국 중앙 정부가 나섰다기보다는 북한과 밀접한 요녕성 국가안전청이 나선 케이스다. 중앙 정부였다면 이렇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자율성이 보장되어 있는 지방 정부가 북한의 요청에 의해 파행적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이유로 ‘김영환 카드’를 꺼내든 것일까. 그 해답은 ‘김영환’이라고 하는 인물의 상징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김 씨는 북한 민주화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진행한 인물이다. 이에 대해 최 대변인은 “북한에서 가장 위협적으로 보는 세력은 두 부류다. 하나는 종교 세력이고 하나는 인권 세력이다. 김영환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인 존재다. 더군다나 3대 세습이라는 내부적 혼란기 속에서 이러한 위협세력에 대한 공격이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최 대변인에 따르면 지난 4월 26일, 있었던 영사 접견 당시 김 씨는 수면부족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건강한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 김 씨는 유 씨 등 나머지 한국인 3명의 감금 여부를 몰랐다고 한다. 다만 김 씨는 영사에게 “정부가 나서서 중국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며 지나친 자극을 경계했다고 한다. 대책위는 앞으로 정부와 공조 하에 대응책 마련과 국제기구 등 외교적 노력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주사파 대부에서 전격 사상전향
▲ 김영환 씨. |
특히 김 씨는 지난 1991년 몰래 북한으로 건너가 김일성 주석과 접견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2009년 기자와 만난 적이 있는 김 씨는 “당시 서해 밤바다 서치라이트를 피해 북한이 마련한 잠수정을 타고 북에 건너갔다.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접견할 수 있었다. 내가 연구하던 주체사상을 직접 창시자인 김 주석과 토론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김 주석은 자신이 만들었다던 주체사상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것보다는 나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였다. 결국 실망만 한 채 북에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김 주석과의 실망스러운 접견 이후 김 씨는 점차 마음을 돌린다. 특히 1990년대 중반 북한 내에서 발생한 집단아사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이끌던 민혁당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지난 1998년 민혁당을 스스로 해체하고 사상 전향을 공개적으로 알렸다. 이후 그는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시대정신 등에 몸담으며 북한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다. [한]
행방 묘연한 3인은
전북 NL계열 출신
이번에 김영환 씨와 함께 체포된 한국인 3명(유재길 강신삼 이상용)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유재길 씨는 전북 정읍을 지역구로 하는 무소속 유성엽 의원의 친동생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특이한 점은 이들 모두 전북대 동문이라는 사실이다. 전북대와 원광대 등 전북지역 NL계열 조직은 지난 1990년대 후반 들어 수뇌부 차원에서 사상을 전향하고 학생 운동권에서 이탈했다. 현재 국내 북한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는 주요 조직 내 인사들 중에서는 이와 같은 전북지역 NL계열 출신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최근 체포된 이들 3명도 1990년대 후반 사상을 전향한 전북지역 NL계열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