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23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식에서 노건호 씨, 권양숙 여사, 문재인 이사장(앞줄 왼쪽부터) 등이 묘역으로 걸어가고 있다. 정연 씨의 13억 밀반출 의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으로 번질 태세다. 사진공동취재단 |
▲ 노정연 씨. |
4·11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지난 3월 불필요한 정치적 오해를 살 것을 우려해 수사를 잠정 중단한 검찰은 이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경 씨의 귀국을 종용하는 한편 자금 추적을 꾸준히 진행해 왔다. 총선과 경 씨의 귀국 거부로 답보상태였던 검찰 수사는 얼마 전 경 씨가 귀국해 조사를 받으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검찰은 최근 문제의 13억 원을 환치기 수법으로 밀반출해 송금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경 씨를 사흘 연속 소환 조사를 벌였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송금 받은 13억 원이 정연 씨의 아파트 구입 자금이라는 취지의 경 씨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경 씨는 자신의 혐의를 대체로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요신문>에 이 사건을 최초로 제보한 댄 리·제임스 형제도 앞선 검찰 조사에서 경 씨의 연락을 받고 만난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쓴 50대 남자로부터 13억 원이 담긴 라면·사과상자 7개를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댄 리 씨는 미국 카지노에서 근무하면서 경 씨를 알게 됐고, 경 씨가 호텔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수억 원을 탕진한 사실을 최초로 폭로하기도 했다. 검찰은 ‘선글라스 남성’을 추적했지만 신원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고 대신 경 씨를 상대로 전달자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다. ‘선글라스 남성’은 노 전 대통령의 지인인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문제의 13억 원이 정연 씨 측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정연 씨를 소환해 자금의 출처 및 범죄 혐의를 집중 추궁한다는 방침이다. 실제로 대검 중수부는 정연 씨 측과 소환 시기 및 조사 방법 등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검찰은 정연 씨가 지난 3월 셋째 아이를 출산해 검찰 소환이 어려울 경우 방문조사나 서면조사로 대체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정연 씨 측은 13억 원을 아파트 구입 잔금으로 경 씨에게 송금해달라고 지인에게 요청한 것은 맞지만 돈의 출처에 대해서는 2009년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당시 이미 해명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검찰은 정연 씨를 상대로 경 씨에게 100만 달러를 송금한 경위, 자금의 출처 등에 대해 철저히 조사할 계획이다. 특히 검찰은 미국으로 밀반출된 13억 원이 박연차 전 회장과 관련돼 있다는 정황을 잡고 박 전 회장 주변 계좌를 집중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돈세탁’ 정황과 의심스러운 해외송금 내역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0년 4억~5억 원대 돈이 박 전 회장 딸(38)의 은행 계좌와 주식거래 계좌를 거치며 ‘세탁’된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검찰은 13억 원의 돈 상자가 전달된 바로 다음 해에 돈 세탁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태광실업과 자회사인 휴켐스 관련 계좌에서 증빙이 명확하지 않은 억대의 유로화 송금 내역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검찰은 13억 원이 밀반출돼 경 씨에게 전해진 뒤 박 전 회장이 추후에 이를 보전해줬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박 전 회장은 지난 2월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 중수부의 방문조사 과정에서 “13억 원은 나와 관계 없는 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또 박 전 회장은 5월 중순경 검찰의 2차례 병원 방문 조사때도 “노 전 대통령에게 사저 조성 명목으로 20억 원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빌려준 게 아니고 선의로 준 것이기 때문에 어디에 썼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경 씨를 비롯한 관련자의 진술과 증거를 확보한 만큼 조만간 정연 씨를 조사한 뒤 사법처리 대상과 수위 및 수사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검찰의 ‘13억 원 출처’ 수사가 자칫 봉인된 ‘노무현 비자금’ 사건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섣부른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 미국 뉴욕 뉴저지주에 위치한 허드슨클럽 전경. 노정연 씨 측은 경연희 씨에게 보낸 13억 원이 이 아파트 구입 대금 잔금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 |
야권 일각에서 ‘노정연 수사’ 이면에는 유력한 친노주자들의 손발을 묶고 대선지형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검찰은 이러한 정치적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 애써 이번 수사와 ‘노무현 비자금’ 사건은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수사 불똥이 어디로 튈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검찰이 끝내 자금의 출처를 밝혀내지 못할 경우에는 정연 씨에 대해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만 적용하는 선에서 수사가 마무리 될 가능성도 열려 있다. 하지만 정연 씨와 관련자 수사를 통해 13억 원의 불법성이 드러날 경우 정연 씨의 사법처리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13억 원의 출처가 ‘노무현 비자금’으로 의심이 될 경우에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여권과 보수단체는 ‘노무현 비자금’ 사건을 전면 재수사하라고 강하게 압박할 것이고, 이에 맞선 야권은 벼랑끝 승부수를 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야 정치권이 사활을 걸고 있는 대선정국을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전쟁터를 방불케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과연 정연 씨 소환조사가 초읽기에 돌입하면서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검찰의 수사 칼끝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13억 원 밀반출 사건이 정연 씨의 개인비리로 마무리될지 아니면 ‘노무현 비자금’ 뇌관을 건드리는 도화선으로 작용할지 대선정국을 앞둔 정치권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
▲ 노정연 씨의 13억 밀반출 의혹에 대해 특종보도한 <일요신문> 2010년 10월 24일자 962호와 12월 12일자 969호. 재계 유력인사의 딸인 경연희 씨의 수상한 행적이 노정연 씨와 관련돼 있었다. |
돈상자와 마스크맨…영화 같은 일 벌어져
<일요신문>은 2010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허드슨클럽 키맨 경연희 씨 미국 카지노서 100억대 탕진 전말’과 ‘노정연-경연희 미국 아파트 이면계약 비밀’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최초로 보도했다.
취재의 시작은 재계 유력인사의 딸인 경연희 씨의 외화밀반출 및 상습도박 의혹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경 씨가 정연 씨로부터 거금을 전달받았다”는 댄 리·제임스 형제의 구체적인 증언은 돈 상자 사진의 폭로와 함께 결국 노무현 일가 비자금 사건으로 확전될 조짐을 보였다. 정연 씨의 미국 허드슨클럽 잔금 명목으로 현금 13억 원이 든 상자 7개를 ‘선글라스를 낀 마스크맨’으로부터 전달받아 경 씨의 지인인 은 아무개 씨에게 전달했고, 은 씨가 이를 경 씨에게 전달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돈 전달 및 환치기 과정에 댄 리 씨 형제가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일요신문>이 최초로 보도한 이 사건은 이후 지난 1월 26일 시민단체인 ‘국민행동본부’가 검찰에 ‘100만 달러 밀반입에 대한 수사의뢰서’를 제출하면서 검찰수사가 본격화됐다. 그리고 대검 중수부가 은 씨로부터 “13억 원이 경 씨에게 전달됐다”는 진술을 확보하면서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이후 수사는 △경 씨가 실제로 카지노에서 거액을 탕진했는지 △막대한 도박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 △정연 씨의 돈을 비롯한 자금들이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유입됐는지 △경 씨에게 유입된 자금이 도박자금 외 어디에 쓰였는지 △아파트 계약과 자금 유입으로 엮인 경 씨와 정연 씨의 수상한 관계의 실체는 무엇인지 △허드슨클럽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예상됐다.
핵심은 허드슨클럽을 둘러싼 미스터리였는데 허드슨클럽 435호 매매계약을 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엘리사 서 씨로부터 “경 씨가 정연 씨에게 집을 파는 계약을 맺은 게 맞고 정연 씨가 계약서에 ‘Roh’라는 자필 서명도 했다”는 결정적인 증언이 나오면서 사건은 허드슨클럽 매매 의혹을 넘어 점점 노무현 일가의 비자금 의혹으로 확전될 조짐을 보였다. 또한 국민들로 하여금 노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봉인됐던 노무현 일가 비자금 의혹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키맨인 경 씨가 검찰의 출석요구에 불응하면서 수사는 난관에 봉착했다. 경 씨는 대신 지난 3월 측근을 통해 “정연 씨에게 돈을 요구하지도 받지도 않았다”고 주장했고, 13억 원 밀반출 의혹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하지만 댄 리 씨는 이에 대해 “잡아뗄 것이 아니라 직접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해야 한다. 13억 원을 경 씨에게 전달했다는 은 씨의 진술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건에 개입한 사람만도 여러 명이다. 우리 형제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도 다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 경 씨 말대로라면 그 사람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되는 것 아닌가”라며 재반박한 바 있다.
하지만 수사 착수 4개월 만에 경 씨가 피내사자 신분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으면서 잠정 중단됐던 수사는 전격 재가동된 분위기다. 댄 리 씨는 그간 “경 씨가 카지노에서 상습도박으로 1000만 달러 이상을 탕진했고 정연 씨의 돈이 경 씨에게 전달된 것은 팩트다. 경 씨에게 돈이 유입된 과정 및 흐름을 파보면 정연 씨 문제를 포함한 모든 의혹들에 대한 실마리가 잡힐 것이다”라고 수차례 강조한 바 있다.
과연 경 씨와 정연 씨, 댄 리 씨 형제간의 진실게임은 어떻게 결론이 날까. 7개의 돈상자와 마스크맨, 돈세탁과 환치기, 카지노딜러, 전직 대통령과 재계 유력인사의 딸이 등장한 마피아 영화 같은 사건의 실체에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