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고문은 대의원 대선주자 호감도 조사에서 수도권과 호남권에서 선두를 차지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먼저 ‘이해찬-박지원 연대’ 파문 이후 최근 민주당 저변에 흐르는 ‘노무현 프레임’ 피로증을 들 수 있다. ‘친노-반노’의 식상한 대결구도에 민주당의 전통 지지층이 돌아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안의 중심에 손학규가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지난 6월 9일 전당대회 결과를 두고 일각에서는 ‘손 고문에게 타격’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당심과 민심에 괴리가 있다’는 평가가 많기 때문에 손 고문으로서는 야권의 향후 대권경쟁이 친노 중심 대결구도에서 제3의 길을 요구하는 쪽으로 흘러갈 경우 그가 유력한 대안으로 평가받을 가능성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박스기사 참조). 여기에 최근의 이념정국도 손 고문의 탈이념 중도주의 노선을 새로운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
노무현이 아닌 완전히 다른 문법으로 대선경쟁에 뛰어들고 있는 손학규의 조용한 부상을 들춰봤다.
6월9일 전당대회 전, 손학규 상임고문측은 한 여론조사 결과자료를 손에 쥐고 상당히 고무된 표정을 지었다. 국가비전연구소와 여론조사기관 타임리서치가 지난 6월 4일 전국의 민주통합당 대의원 2286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7일 공개한 결과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 중 24.4%는 문재인 상임고문, 22.8%는 손학규 상임고문, 20.7%는 김두관 경남도지사에게 각각 가장 호감이 간다고 답변했다.
손 고문 측이 이 결과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두 가지다. 문 고문의 강세는 이미 예상했던 것이지만 최근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두관 지사를 제치고 2위를 차지한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손 고문 측의 한 정무 관계자는 이에 대해 “아직 손 고문이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전국 순회투표 과정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김두관 지사보다 높은 지지율이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드디어 민주당이 손 고문을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호남의 민심도 주목하고 있다. 손 고문은 이번 조사에서 수도권(서울·경기·인천)에서 1위(26.1%)를 차지하는 동시에, 광주 등 호남권에서도 27.7%로 문 고문(17.2%)과 김 지사(17.6%)를 크게 따돌리고 선두를 차지했다. 앞서의 손 고문 관계자는 이에 대해 “호남은 전통적으로 친노를 떠받치던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번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후보가 그곳에서 3위를 차지한 것은 호남이 사실상 문재인 고문을 대권주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다. 이번 대의원 조사도 그런 호남 기류의 변화 정서를 대변했다고 볼 수 있다. 전대 전체의 결과는 다소 실망스럽지만 손 고문이 호남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향후 대권경쟁의 큰 변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손학규 고문은 지난 2007년 3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그의 표현대로 지금까지 줄곧 변절자의 ‘주홍글씨’가 그의 이마 위에 남아 있다. 여기에다 그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중도주의 성향은 ‘회색분자’로 낙인찍히는 빌미가 됐고, 보수와 진보의 틈바구니 속에서 선택을 강요당해야만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손학규의 이런 단점들이 정치적 상황의 급변과 함께 오히려 장점들로 치환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6·9 전당대회 결과는 손 고문에게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온다. 수도권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각인시켜주지 못한 것은 대권 가도의 마이너스 요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손풍’의 부상 가능성도 동시에 발견된다. 정치 전문가들은 전대의 전국 순회투표를 “민주당이 노무현 프레임에서 탈피하려는 첫 번째 정치적 사변이자 당 체질과 지형변화의 변곡점”(전계완 MBN아카데미 대표)이라고 말한다. 조직도 없던 ‘떠돌이’ 김한길 후보가 친노의 좌장격인 이해찬 후보를 넘어서는 기류가 그것을 방증한다. 이는 곧 DJ정부와 참여정부를 관통해온 민주진보정부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창조적 해체 작업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전국 순회투표에서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 것은 민주진보진영의 노무현 프레임에 대한 피로증이 깊어진 것을 대변한다. 노무현 정신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이명박이라는 상대가 있을 때 비교우위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올해 4·11 총선을 거치면서 최대의 비판상대였던 이명박이라는 벽이 사라진 이상, 이제 노무현을 거론하거나 지지하는 것은 허공에 대고 주먹질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올 대선은 완전히 노무현의 색깔을 탈색한, 전혀 다른 비전으로 덤벼야 한다. 한마디로 노무현 정신과 정치는 구분돼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손학규의 부상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민주당이 지난 2007년 대선 패배 이후 끊임없이 추구해온 노무현 프레임 탈피 시도가 5년이 지나 대선을 앞둔 지금에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해체움직임’이 시작됐고, 그 작업의 적임자가 바로 손학규 고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문재인 고문이 노무현을 버리겠다고 한 것이나, 김두관 지사가 노무현을 넘어서겠다고 하며 ‘비욘드 노무현’을 외치고 있지만 이들은 태생적으로 노무현 프레임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 고문을 업은 이해찬 후보가 전국 순회투표 과정에서 힘을 못 쓴 것이나, 김 지사가 전대 과정에서 친노의 역풍을 맞아 주춤한 것도 모두 노무현 프레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실장은 이에 대해 “대선은 투표율이 70%에 육박하게 되는데 여기에 참가하게 될 중도 무당파 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친노 프레임만으로는 안 된다.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기류 그것을 반영해야 하는데 그것이 ‘비욘드 노무현’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손학규 고문이 ‘비욘드 노무현’ 정국의 선두주자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야권의 대권경쟁 구도도 바로 이 지점에서 1차 지각변동이 있을 전망이다.
이석기-김재연 사퇴 정국이 부른 종북 논란과 이념정국의 도래도 손 고문의 경쟁력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문재인 고문과 김두관 지사는 참여정부의 요직을 거쳤다는 점에서 향후 대북정책도 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손 고문은 다르다. 그는 한나라당 시절부터 대북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지만 북한 인권문제 등에 대해서는 정부가 할 말은 하고 요구할 것은 요구해야 한다는 이른바 실용적 중도주의에 가깝다.
전계완 MBN아카데미 대표는 이에 대해 “이석기-김재연 사퇴정국으로 진보진영 전체가 피해를 입고 있다. 새누리당이 종북논란을 부추기고 색깔론을 퍼뜨리고 있는데 민주통합당이 매카시즘만 내걸고 대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해찬 신임 대표가 더 선명한 대북노선을 견지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이석기 사태를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민심과는 온도차가 있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이석기-김재연 사태를 대선 때까지 끌고 가면서 민주당을 그와 한 통속으로 압박해 나갈 것이다. 자칫하면 이번 대선이 종북논란과 북한문제에 대한 찬반 투표로 흐를 수도 있다. 이때 손 고문의 유연하고 폭넓은 대북정책이 오히려 사태 해결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해찬 대표가 전대 과정에서 ‘북한 인권법이 내정간섭이자 외교적 결례’라고 주장하며 진보진영의 선명성 경쟁을 유도했지만 그것은 민심과는 거리가 있는, 지지세력 결집용이라는 평가가 많다. 전대 승리를 위한 다분히 정략적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권주자를 띄워야 하는 입장에 있는 이 대표로서는 향후 그의 ‘친북’ 스탠스도 민심에 맞춰 유연하게 바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문재인 고문 또한 결국 ‘친노’의 대북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손학규 고문보다 운신의 폭이 좁다고 할 수 있다.
한 민주당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대선 정국이 본격적으로 달아오르면서 대북문제를 두고 민주당 내부에서 갈등이 커질 것 같다. 집권을 위해 더 좌클릭하며 선명한 진보노선을 추구해야 한다는 측과 중도층을 끌어안기 위해 여론 추이를 봐야 한다는 신중론이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손 고문의 역할이 중요하다. 친노의 대북 프레임에서도 자유롭고 보수적인 노선도 같이 가져갈 수 있어 양측 갈등의 완충역할을 할 수 있다. 한때는 회색분자로 몰렸지만 대북문제의 갈등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그것이 통합의 매개체로 작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 6월 9일 민주통합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후보(가운데)가 당대표로 선출됐다. ‘친노 조직력’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는 평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조직력’ 말고 ‘민심’을 주목해
지난 6월 9일 끝난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상임고문이 ‘어렵게’ 당선됐다. 이 고문은 총 득표율 24.3%를 기록, 김한길 후보(23.8%)를 간발의 차이(0.5%포인트)로 제쳤다. 이 고문이 친노주류임에도 어렵게 당권을 차지한 것에 대해 “김한길이라는 여론흐름을 친노의 조직력으로 극복했다”라는 평가가 많다. 특히 민심을 반영할 것으로 보았던 모바일투표도 친노세력이 막판에 대거 참여해 조직선거로 흘렀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렇다고 해도 경기도당 위원장까진 지낸 조정식 의원이 당선권에 들지 못한 것은 손학규 상임고문에게는 미흡한 결과다. 수도권 내 영향력을 이번에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 그럼에도 이번 모바일투표(조정식 의원은 이 부분에서 꼴찌를 기록)가 조직대결 양상을 보여 ‘충성심 높은 당심’만 확인된 것일 뿐 민심과는 괴리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한길 후보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당심과 민심이 왜곡된 결과를 우려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이 고문의 당선보다는 당심 밑에 흐르는 도도한 민심을 주목해야 한다. 조직력 없는 김한길 후보가 아깝게 패했다는 것은 그만큼 민심이 현재의 당 지도부에 대해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 손학규 고문은 앞으로도 친노중심의 당 역학구도에 얽매여 대선행보를 할 것이 아니라 민심을 얻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고문이 당선됨으로써 문재인 상임고문의 대세론이 더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견과 반대의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지지율 하락 조짐을 보이던 문 고문이 이해찬 고문의 당선으로 한숨 돌리게 됐고, 대세론도 탄력을 받아 조기에 대권구도가 정착될 수 있다.
하지만 “김한길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문 고문의 대권 운신 폭을 오히려 넓혀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해찬 당대표 체제가 ‘예상대로’ 들어서면서 문재인 고문에게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 고문으로서는 이번 전대를 통해 이해찬 ‘그늘’에서 벗어나 탈계파 광폭행보를 펼칠 기회를 놓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탈 노무현 광폭행보’의 과실은 오히려 손학규 고문이 가져가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