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고문이 ‘이해찬 프레임’에 갇혀 대권가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임준선 기자 |
다른 최고위원의 한 측근은 “지역이나 계파를 넘어서지 못하게 한 세력이 도대체 누구냐”고 꼬집었다. 친노(친노무현)그룹을 대표하는 문재인 고문과 이해찬 대표가 ‘이-박 연대’라는 꼼수를 쓰는 바람에 경선 과정에서 당이 둘로 갈라졌다는 얘기였다.
편지의 내용을 뜯어보면 이번 당대표 경선이 철저히 ‘친노(친노무현) 대 비노(비노무현)’의 대결 구도로 치러지고, 특히 ‘이-박 연대’가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됐던 게 문 고문에게 큰 심적 부담으로 다가갔음을 알 수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친노·비노 프레임’을 깨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문 고문으로선 ‘당이 이대로 가서는 대선 승리가 어렵겠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 당대표로 선출된 이해찬 후보. 유장훈 기자 |
문 고문의 상처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닌 가장 큰 이유는 이번 경선 과정에서 민주당원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에게 ‘이해찬=문재인=친노’라는 등식이 보다 분명하게 각인됐기 때문이다. ‘이-박 연대’ 성사를 위해 문 고문이 직접 박지원 원내대표를 설득하는 데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 고문이 이 대표와 한 묶음으로 엮여버린 것이다. 이는 문 고문 스스로 가장 경계해 온 바다.
문 고문은 친노의 틀에 갇혀서는 대선 승리도 없고 설사 집권을 하더라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자주 피력해 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철학과 가치는 계승해야 하지만 노무현 정부 5년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실패들을 적잖게 노정했다는 것이다.
문 고문은 지난 8일 모교인 경희대에서 열린 ‘청년들과의 광장토크’에서 “참여정부 시기에 민생 문제,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뼈아픈 부분”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신자유주의는 그 시기에 도도한 하나의 세계적 흐름이었다”면서도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장악되고 있었던 흐름 속에서 참여정부가 제대로 그 흐름들을 억제하지 못했다. 뼈아픈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문 고문은 또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앞둔 지난 15일 기자간담회에서도 ‘친노 프레임’을 깨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친노 프레임’이 작동할 빌미를 주지 않도록 앞장서 노력할 것”이라며 “대선 캠프에 친노·비노가 없다는 믿음을 줄 정도로 폭을 넓히고, 정책과 비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뛰어넘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고문의 평소 신념이 이러했기 때문에 당내에선 문 고문이 ‘이-박 연대’ 과정에 개입한 것을 심각한 패착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수도권의 한 중진의원은 “민주당을 대표하는 대선주자가 마치 이해찬 대표의 측근 의원 중 한 명인 것처럼 가볍게 처신했다”며 혀를 찼다. 이 의원은 “오죽하면 이 대표와 경쟁했던 김한길 최고위원이 경선 과정 내내 ‘문재인 고문은 담합과 관련이 없다더라’는 식으로 해명을 해 주고 돌아다녔겠느냐”며 “문 고문의 성품으로 볼 때 선의로 그랬겠지만 결과적으로 문 고문 자신에게도, 민주당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한 486그룹의 의원은 김한길 최고위원이 아니라 이해찬 대표가 승리한 게 문 고문에게 더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이 의원은 “이해찬 대표 체제 하에서 대선후보 경선이 치러지게 됐는데, 불공정 경선 논란이 일어날 때마다 ‘이해찬-문재인 커넥션’이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 대표가 먹어야 할 욕을 문 고문이 먹게 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해찬 대표의 극적인 역전승 과정이 개운치 않았던 것도 문 고문에겐 부담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불과 0.5%포인트 차로 1·2위가 결정된 이번 경선 결과를 두고 당내에선 “당심과 민심에서 이긴 김한길 최고위원이 조직에서 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지역별 대의원 투표와 정책대의원 투표, 권리당원 투표 등에서 김한길 최고위원이 우위를 점하고도 ‘모바일 투표’에서의 열세로 인해 패한 것은 정상적인 투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모바일 투표 선거인단 모집 마감에 임박해 통합진보당(통진당) 당원들이 대거 선거인단으로 등록하고 이들 대부분이 이해찬 대표를 지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극히 이례적이지만 ‘모바일 투표’와 대의원 투표 등에 이중투표를 한 사례가 확인됐다. 일각에선 통진당 내 유시민 전 대표가 이끄는 국민참여당계뿐 아니라 구당권파 당원들도 선거인단에 대거 등록했고, 최소한 그 규모가 1만 명을 넘어선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이해찬 대표의 극적 역전승의 이면에 ‘불편한 진실’이 숨어 있다는 얘기다. 이는 친노그룹에 대한 당내 여론을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로 이해찬 대표 등 지도부는 첫 지방 방문 일정으로 지난 13일 광주를 방문했다가 신랄한 쓴소리를 들었다.
이날 광주 최고위원회의에서 강운태 광주시장은 “2002년 대선 때 호남 투표율이 87%였지만 2007년 대선 땐 65%로 떨어졌다”며 “투표율이 낮아진 것은 민주당에 대한 지역민의 서운한 마음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 시장은 “호남과 민주당은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젠 자식(민주당)이 부모를 생각하는 효도정치를 해 달라”고 말했다.
박준영 전남지사도 “호남 지역 당원은 2만~3만 명이고 부산 지역 당원은 1600명인데 대표 경선에서 부산 1명당 호남 20명으로 가치를 보정해 줘서 호남의 불만의 크다”며 “이러다 보니 ‘당원의 의무는 있는데 권리는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 거들었다. 그는 “광주·전남 지역의 매년 당비가 10억여 원인데 권리는 20분의 1이라면 누가 당비를 내겠느냐”며 “호남 지역 당원들의 권리가 훼손되지 않도록 공정한 룰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호남소외론’을 대변한 발언들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친노그룹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는 해석이 주를 이뤘다.
문 고문을 둘러싼 ‘친노의 틀’이 더욱 강화되고 친노그룹에 대한 반감이 강해진다는 것은 그의 대권가도에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같은 친노그룹으로 분류돼온 김두관 경남지사가 최근 대선 출마선언을 앞두고 ‘비욘드(beyond) 노무현’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는 것은 문 고문에게 상당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김 지사가 ‘노무현의 철학’은 계승하면서도 ‘친노는 아닌’ 대선주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비욘드 노무현’의 이미지는 단지 김 지사의 레토릭(수사)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봐도 문재인 고문과는 상당히 큰 차별점을 알 수 있다. 지난 11일 김 지사의 대선 출마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던 민주당 의원 11명은 원혜영, 김재윤, 민병두, 문병호, 최재천, 강창일, 안민석, 배기운, 김영록, 김승남, 홍의락 의원 등이었다. 이들 중 원혜영 의원은 재야 출신, 민병두·강창일 의원은 정동영계 출신, 문병호·최재천·안민석 의원은 천정배계 출신, 배기운 의원은 동교동계 출신이다.
지난 14일 김 지사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기자회견을 연 전직 의원 및 장관급 인사들의 면면도 그렇다. 이날 회견에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윤원호 전 의원, 이강철 전 청와대 사회문화수석, 정해주 전 산업자원부 장관, 추병직 전 건설교통부 장관 등 친노그룹 출신들도 참여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김태랑·김기재·유삼남·허운나 전 의원 등은 ‘김대중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고 장영달·이철 전 의원은 재야 출신이다. 김 지사를 돕는 참모들 중에도 손학규계나 정세균계 출신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를 ‘무지개 연합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미 ‘김두관 캠프’는 친노를 넘어선 것이다.
문재인 고문도 최근 동교동계의 좌장격인 권노갑 상임고문과 접촉을 시도하고 손학규계의 김부겸 전 최고위원 영입을 타진하는 등 ‘외연 확장’을 위한 모색에 나섰다. 이호철 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 등 문 고문의 핵심 참모들은 ‘문재인 캠프’에서 주요 보직을 맡지 않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이대로 있다가는 문 고문이 ‘친노’라는 울타리에 갇히는 반면 김 지사를 비롯한 경쟁자들이 강력한 대항마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문 고문의 외연 확장 시도가 큰 성과를 내지는 못한 상황이다. 17일 대선 출마선언과 동시에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문재인 고문에게 떨어진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