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적 다양성 추구 OTT가 활로 열어줘…전도연 김희애 고현정 엄정화 등 맹활약
예능 속 한 장면으로 가볍게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이는 대한민국 방송가의 현실을 꼬집는 대목이기도 하다. 20∼30대 데뷔해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들은 50대가 되면 자연스럽게 ‘OOO의 엄마’ 역할을 맡아 변두리로 밀려난다. 여배우의 경우 주인공으로서 활동 기간이 더 짧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여배우들의 물리적 나이에 대한 선입견이 옅어지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하며 그들이 작품 속에서 맡을 수 있는 역할 또한 다양해졌다. 아울러 생명력도 길어졌다. 이런 현상은 지상파, 종편, OTT 플랫폼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OTT가 바꾼 풍속도
K콘텐츠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넷플릭스는 요즘 ‘50대 여배우 전성시대’를 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배우 전도연(50)이 끌고, 김희애(56)가 밀었다고 할 법하다. 3월 말 공개된 전도연 주연 ‘길복순’은 사흘 만에 누적 시청 시간 1961만 시간을 돌파하며 글로벌 톱10 영화(비영어) 부문 1위에 올랐다. 무려 82개국에서 정상에 등극했다. 더욱 눈길이 가는 건 전도연의 배역이다. 그는 ‘길복순’에서 A급 킬러 길복순 역을 맡아 고난도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최근 공개된 ‘퀸메이커’를 이끄는 김희애는 50대 배우 중에서 맏언니 격이다. 극 중 대기업 전략기획실 출신 이미지 메이킹의 귀재 황도희 역을 맡은 그는 ‘코뿔소’라 불리는 인권 변호사 오경숙(문소리 분)을 서울시장으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을 능수능란하게 소화했다.
이 배턴은 고현정(52)이 이어받는다. 고현정의 첫 OTT 도전으로 화제를 모은 ‘마스크걸’이 하반기 공개된다. 직업군도 독특하다. 동명 웹툰을 바탕으로 한 ‘마스크걸’은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평범한 직장인 김모미가 밤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인터넷 방송 BJ로 활동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데, 고현정은 타이틀롤 김모미를 연기한다.
장르적 다양성을 추구하는 OTT는 여배우들의 활로를 열어줬다. 통상 시청률과 해외 수출에 기대는 TV 드라마의 경우 지명도 높고 젊은 한류스타를 선호한다. 그들을 기용해야 시청률 상승에 도움이 되고 더 비싼 가격으로 판권을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OTT의 계산법은 다르다. 이미 해외 유통망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콘텐츠를 자체 소화한다. 그래서 연기적으로 여물지 않은 한류스타를 무조건적으로 기용하기보다는 콘텐츠의 흐름을 정확히 짚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연기력을 갖춘 중견 배우를 주저 없이 선택한다. 게다가 그들에게 주어지는 직업군을 비롯해 이야기의 플롯도 새롭기 때문에 이미 많은 필모그래피를 남긴 중견 배우들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환영받는 여성 서사
최근 세계적으로 ‘F등급’(Female-Rating)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다. 여성 감독이나 각본가, 배우들이 참여하는 작품을 뜻한다. ‘F’는 ‘Female’, 즉 여성을 뜻한다. 2014년 영국에서 열린 제24회 배스 영화제에서 처음 사용된 표현이다. 그동안 콘텐츠 시장이 지극히 남성 중심적으로 구축된 것에 대한 반기인데, 새로움을 추구하는 콘텐츠 시장에서는 오히려 자극제가 되며 낯선 이야기를 발굴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는 TV 콘텐츠에도 해당된다. 4월 15일 첫 방송된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의 타이틀롤은 엄정화(54)가 맡았다. 의대 졸업 후 20년 넘게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왔으나, 자신의 삶을 되찾고자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1년 차로 복귀한 여성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국 시청률 4.9%로 출발선을 끊은 ‘닥터 차정숙’은 4회 만에 11.2%까지 치솟았다. “재밌다”는 입소문과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경력 단절 여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며 대리만족을 선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로맨스 콘텐츠 시장도 더 이상 20∼30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도연은 ‘길복순’에 앞서 JTBC 드라마 ‘일타 스캔들’에서 반찬가게를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는 엄마의 억척스러운 삶과 가슴 떨리는 연애담을 동시에 선사했다. 극 중 실제 10세 연하인 후배 배우 정경호와 이질감이 전혀 들지 않는 애틋한 로맨스를 보여줬다.
중요한 건 ‘길복순’에서도 ‘일타 스캔들’에서도 전도연이 맡은 역할은 딸을 키우는 엄마였다. 50대라고, 엄마라고 사랑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엄마와 여자, 두 수식어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국 소신 있는 선택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현실 속에서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 이들의 마음에 연고를 발라준 셈이다.
한 방송 관계자는 “기존 콘텐츠 속 50대 여성의 로맨스는 주로 ‘불륜’을 매개로 진행됐다. 하지만 최근 공개되는 콘텐츠들은 그들의 일과 사랑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고 또 주체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다”면서 “현실의 변화와 콘텐츠가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적 시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평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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