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현 2단은 이창호 9단과 같은 전주 출생인 데다 어린 시절부터 기재를 드러내 ‘제2의 이창호’로 불렸다. |
현재 국내 랭킹 15위인 나 2단은 통합예선에서 왕타오 4단, 린췬옌 3단, 판팅위 3단 등 중국 선수들만 만나면서 3연승했고, 본선에 올라온 후 첫 판 32강전에서도 중국의 당이페이 4단을 꺾는 등 이번 대회에서 중국 선수에게 5연승을 기록, 중국 킬러로 떠오르고 있다. 왕타오와 린췬옌은 낯설지만 판팅위와 당이페이는 요 근래 뻔질나게 이름이 오르내리는, 중국이 자랑하는 ‘90세대’ 멤버다.
8강에 올라간 한국 선수는 팀의 막내 나현 외에 최철한(27) 원성진(27) 이영구(25) 강동윤(23) 9단 등 5명. 최철한은 2006-2009년 제10, 13회 두 번이나 우승컵을 안았던 구리(29)를 제쳤고, 강동윤은 중국의 또 다른 신예 펑리야오 5단(20)을 꺾었다. 두 판 모두 반집승. 이영구는 몇 명 출전하지도 않은데다가 그나마 혼자 남아 고군분투하던 대만의 샤오정하오 6단(24)을 주저앉혀 매정하다는 소리를 들었고, 원성진은 후배 최기훈 4단(24)을 따돌렸다.
8강의 나머지 세 자리는 중국. 리캉 6단(25), 스위에 5단(21), 리엔샤오 4단(18)이 이창호 9단(37), 이세돌 9단(29), 박정환 9단(19)에게 이겼다. 리엔샤오는 앞서 32강전에서도 2011년 제15기 우승자, 재중동포 박문요 9단(24)을 물리쳤다. 이래서 한-중전은 6판이었는데 결과는 3승 3패.
8강전은 한국 대 중국이 5 대 3. 오랜만에 우리가 숫자에서 앞섰다. 그러나 LG배를 네 번이나 장악했던, 최다우승자 이창호, 국내 랭킹 1위로 장기집권하고 있는 이세돌, 올 시즌 국내 무대에서 18연승으로 쾌속질주하고 있는 랭킹 2위 박정환이 중국 신예들에게 발목을 잡힌 것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이창호는 LG배에서 1997년 초대 우승을 비롯해 1999년(3회), 2001년(5회), 2004(8회) 대회에서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세돌은 2003(7회), 2008년(12회) 대회를 제패했다.
▲ 제 17회 LG배 세계기왕전 8강에 오른 기사들. |
탄샤오가 지금은 랭킹 1위고, 스위에가 5위인데, 나현의 말에 의하면 “신예 중에서는 판팅위가 제일 강한 느낌”이라는 것. 하긴 제일 어리니까. 아무튼 중국은 신예가 많기도 많다. 매년 줄지어 쏟아지고 있다. 한두 해 잠깐 한눈팔다보면 우리 기사 맞은 편에는 새 얼굴이 앉아있다. 어려운 이름 외기도, 혀 굴리기도 힘들다. 사람 이름이나 지명은 한자를 그냥 우리 식으로 읽으면 편리할 텐데, 아예 바둑에서는, 우리끼리는 그런 식으로 하자고 규정을 바꿔 버리면 어떨까. 중국 발음대로 한다면서도 어떤 사람은 콩지에, 또 어떤 사람은 쿵제, 씨에허, 셰허 식으로 헷갈리게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번에 나현을 기대해 본다. 나현은 까마득한 선배 이창호와 같은 전주 출생이어서 더 그랬을 테지만, 나현이 기재를 드러내던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서는 그를 “제2의 이창호”라고 불렀다. 나현의 가족도 제2의 이창호를 향한 포부를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궁극의 목표는 제2의 이창호이겠지만 당장의 표적은 박정환이다. 생김새 분위기도 비슷하다. 임전소감이 당차다. 장웨이지에를 이기고 나서는 “특별한 느낌은 없다. 어려운 바둑을 후반에 역전했다”고 겸양을 보이면서도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라고 당당히 말했다. 본선 전야제에서 이창호 9단은 “이번 우승은 박정환일 것 같다”고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그리고 나현(羅玄)이란 이름, 근사하다.
8강, 4강전은 몇 달 쉬었다가 11월 4~7일 열리며 8강전은 최철한-리엔샤오, 원성진-이영구, 강동윤-리캉, 나현-스위에의 대결이다.
LG배는 총예산 13억 원에 우승상금이 3억 원, 준우승 8000만 원. 제한시간 각자 3시간에 60초 초읽기 5회, 속기전이 아닌 이른바 정통기전, 본격기전이다. 돌을 가릴 때 한쪽이 백돌을 한주먹 쥐고 상대가 홀짝을 불러 맞히면 맞힌 사람이 흑돌을 잡는 것이 보통인데, LG배에서는 홀짝을 맞힌 사람이 흑백을 선택한다. 백을 잡고 싶으면 백을 선택하는 것.
다 좋고 재미있는데, 결승3번기가 2013년 2월 18~21일에 한국기원 1층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치를 예정이라는 소식은 좀 그렇다. 장소가 그렇게 없는 걸까. 13억 원이나 들이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인데 말이다. 정말 가난했던 옛날에도 결승전 같은 바둑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장소에서 공개해설도 하고, 팬 사인회도 하고 했는데. 더구나 요즘은 바둑도 체육이라면서. 좀 재고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이광구 객원기자
<1도>가 16강전 당시의 상황. 우변 흑1과 좌변 백2가 교환되었다. 흑1보다는 백2가 커 보이는데, 백2가 뻔히 보이는데도 흑1을 택한 것은 A의 곳 단점 때문이었다. 끊겨도 자체로 살겠다는 것. A의 곳을 잇는 것은 공배를 연결하는 수니까. 백이 흑1 자리를 선수로 들여다보고 이쪽에 집을 만드는 것도 싫고. 그러나 이게 참변의 시발이었다.
백2에 흑은 다시 상변 쪽 3, 5로 손을 돌렸다. 여기도 급한 자리. 백이 먼저 5의 곳에 호구치는 걸 허용할 수 없다. 게다가 선수다. 흑B가 엄청난 수니까. 그런데 영민한 나 2단이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2도> 백1로 이어 흑2와 교환한 후 3으로 끊어 버린 것. <1도> 흑1은 바로 이때를 대비한 것 아닌가? 끊겨도 흑4면 사는 것 아닌가? 아니었다.
<3도> 백8의 일격으로 흑 대마는 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