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수 지사가 그동안의 주장을 뒤집고 경선 참여를 선택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최근 비박주자들의 경선룰 전쟁을 지켜보던 새누리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김문수 경기도지사의 행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김 지사 측은 경선 룰이 확정되는 7월 9일까지 최대한 결정을 늦출 예정이지만 그동안의 주장을 뒤집고 경선 참여로 많이 기울어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김 지사의 말 바꾸기에 대한 비난여론이 거세다. 한편에서는 보수층의 대선승리를 위해 김 지사가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며 독배를 들이켠 소크라테스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차후를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김 지사는 이번 경선룰 전쟁에서 어떤 결정을 하든 간에 정치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앞서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예선도 통과하기 힘든 선수가 결승전 날씨 걱정을 하고 있다. 김 지사가 이번 경선룰 전쟁에서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사실상 2기 도정을 끝으로 정치적 생명이 끝난다고 본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런데 차차기 준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참모들도 너무 생각들이 없는 것 같다. 나이도 2017년이면 66세다. 무엇보다 그때가 되면 안희정 송영길 등 야권의 차세대 주자들이 대권도전을 할 것인데 김 지사의 낡은 스펙으로 경쟁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번 경선룰 전쟁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김 지사의 ‘실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다. 비박주자들과 박근혜 전 위원장간의 경선 샅바싸움을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규칙개정 논란에만 국한시킬 경우 김 지사의 참여행보는 일견 설득력이 있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이에 대해 “경선 룰 개정만 놓고 보면 박근혜 전 위원장의 버티기는 자신을 지지해준 막강한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상적 정치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민심이자 당심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비박주자들이 오픈프라이머리를 강하게 주장하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미미하기 때문에 정치게임으로 보면 당연히 다수결에 따르는 게 순리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박주자들도 경선 룰 싸움에만 집착하지 말고 정책으로 자기들의 목소리를 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경선룰 전쟁을 단순히 규칙 개정이 아니라 당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심각한 문제제기를 했다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만약 김 지사가 경선 참여를 결정한다면 이는 말 바꾸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뿐만 아니라, 박근혜 전 위원장의 일방적 의사결정에 굴복하는 모양새가 된다는 점에서 더 큰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대권에 도전하는 주자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원칙이 무너지는 데에도 자신의 정치적 안위를 위해 적당히 타협하려 한다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 정몽준 김문수 이재오 등 비박주자 3인의 단일대오가 김 지사의 변심으로 흔들리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에 경선 참여 여부를 두고 김 지사 측도 상당한 내부이견을 노출시키고 있다. “그래도 차차기를 준비하며 돌아가자”는 ‘회군파’와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을 것”(신지호 전 의원)이라는 ‘사수파’로 나뉘어 연일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것. 차명진 전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회군파’는 경선에 참여하면 당을 위해 희생한다는 이미지를 세울 수 있고, 페이스메이커로 경선 흥행에 기여하면서 ‘박근혜 이후’를 노릴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반면 신지호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하는 ‘사수파’는 그동안 줄기차게 완전국민경선제와 경선불참을 주장해오다가 이해득실을 따져 갑자기 참여로 선회할 경우 명분도 잃고 신뢰도 잃게 되는 최악의 결정이 될 것을 우려한다.
사실 김 지사의 말 바꾸기는 이번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김 지사는 대선 출마를 두고 그동안 줄곧 “대선에 출마한다면 지사직을 사퇴할 것”이라고 했었고, 측근들에게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 사퇴하고 (대선에) 뛰겠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난 4월 말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내가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경우 임기를 마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라고 밝혀 논란을 자초한 바 있다. 이때 남경필 의원 등 수도권 정치인들이 대선에서 새누리당이 경기도지사직을 잃을 수도 있고 대선에도 악영향을 준다며 만류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김 지사의 ‘뜬금없는’ 변심은 그의 신뢰성에 먹칠을 하는 계기가 됐다. 그 뒤 경선 참여를 두고 또 다시 말 바꾸기 논란이 이어지자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김 지사가 대권 욕심과 정치 생명 연장에만 매달려 총기를 잃은 것 같다”라는 직설적 비판까지 나왔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럽게 된 것은 참모들간의 이견을 김 지사가 조정해내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에서 오랫동안 당무를 맡아온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최근 논란을 보면 딱 김문수 지사의 정치스타일과 비슷한 것 같다. 원칙을 견지하며 대권 도전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결과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자꾸 말이 바뀌는 것 아니겠느냐. 도지사 유지 논란 등에서 보면 그는 원칙을 관철하고자 하는 뚝심의 정치인이라기보다 상황논리에 빠져 오락가락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본다. 당의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계속 부각시켰다면 정치적 명분을 가져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본말이 바뀌어 차차기를 도모하는 방편으로 경선 참여를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당당하게 경선룰 전쟁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항의의 표시로 그동안의 말을 지키는 것이 원칙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김 지사가 참모들의 ‘강권’뿐 아니라 친박계의 회유에도 넘어가 마음이 변한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아직 김 지사가 최종결정은 하지 않아 그 결말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친박계와의 ‘교감’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에 대해 “김 지사가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과대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친박계는 경선 성공을 위해 일단 김 지사를 최대한 끌어들이려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일회용이다. 누가 다음을 보장해줄 수 있느냐. ‘김 지사가 이번에 협조해주면 나중에 나에게도 이득이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했다면 오산이다. 김 지사는 이번에 무조건 반박 행보를 취해야 한다. 그게 김문수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경선에 참여해 자신의 색깔이 흐려질 경우 그나마 지금까지 유지해온 ‘개혁’ 이미지도 한순간에 날아갈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김 지사가 7월 9일 경선룰 개정 데드라인을 앞두고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이미 정치적 위상과 신뢰도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많다. 일각에서는 “김 지사가 이렇게까지 말 바꾸기 혼란에 빠진 것은 참모들의 정무적 보좌기능 수준이 떨어지고, 김 지사도 귀가 얇아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아픈 지적도 나온다. 김 지사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김두관 경남도지사는 지난 5월 말 지사직 유지에 대해 “양손에 떡을 들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밝힌 바 있다. 김문수 지사는 과연 양손에 떡을 쥘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 정몽준 의원과 이재오 의원. |
제3지대 제3주자 세우기 솔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경선룰 정국에서 비박연대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지만 이재오 정몽준 두 의원은 여전히 비타협 마이웨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박근혜 전 위원장이 자신들의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아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했지만 그렇다고 마땅히 대응할 카드도 없다. 탈당은 두 사람 모두 ‘아니다’라고 선을 긋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이 대선에서 패배라도 하게 된다면 그 덤터기 일부를 두 사람이 쓰게 돼 정치생명도 끝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경선불참과 함께 당 잔류를 택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마저도 당내 영향력이 현격히 축소돼 뒷방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다.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가 제3지대론이다. 어차피 ‘박근혜 당’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밖으로 뛰쳐나가 제3지대를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앉아서 죽으나 서서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두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적극적인 대권행보를 취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재오 의원은 2008년의 공천 학살 때문에 친박계에 ‘확실하게 찍힌’ 데다가 나이도 많아 차차기에 대한 희망이 없는 상태다. 정몽준 의원도 탈당과 잔류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지만 그의 ‘충동적 DNA’를 고려해 보면 ‘무소속 전문’으로 남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새누리당의 한 소장파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몽준 의원에게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박근혜 전 위원장에 대한 뼛속 깊은 열등감과 질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향후 경선 정국에서 그는 이성적 판단보다 감정적인 대응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미 지난 2002년 대선 때 보여준 막판 단일화 파기 선언이 그것을 잘 말해주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정치권에선 ‘이정(이재오-정몽준)연대’의 가능성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다. 두 사람이 모두 탈당해 제3지대에서 창당한 뒤 그들을 대표하는 제3의 주자를 내세우는 것이다. 최근 친박계의 한 의원이 비박계 대권주자 중 1인을 겨냥해 ‘만 표를 얻는 한이 있더라도 박근혜 표를 쪼개겠다’는 발언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던 대목도 이런 최악의 표 갈라치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박사모 정광용 회장이 “이명박 대통령이 이재오 의원에게 ‘안철수 원장을 밀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주장을 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이재오 의원 측은 ‘소설’이라고 일단 부인했다. 하지만 미운 박근혜보다 무덤덤한 안철수가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지 않을까.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