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상연 초단(왼쪽)과 나현 2단. |
6월 28일 한국기원 대국실. 제56기 국수전 본선 16강전의 한 판. 나현 2단(17) 대 민상연 초단(20)의 대결. 나현이 흑을 들었다. 2010년에 입단한 나현은 지난번에 소개했듯 최근 한창 주목받는 기대주. ‘박정환 9단(19) 다음’으로 꼽힌다고 말하면 간단하다. 민상연(20)은 지난해 입단한 그야말로 신예. 나현보다 세 살이 많은데, 입단은 1년 반쯤 늦었지만 역시 기재를 인정받고 있다.
<1도>가 나현-민상연 대국의 서반이다. 흑1부터 백4가 모두 소목. 고풍이다. 1960~70년대까지는 흔히 보았던 기억이 있지만,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이렇게 출발 네 수가 전부 소목인 바둑은 구경하기 힘들었다.
백4까지에서 흉내의 조짐이 나타났지만, 흑1과 백2가 달랐으므로 아직 본격 흉내는 아니었다. 흑5와 백6의 걸침. 똑같다. 그러나 걸치는 수까지는 또 그럴 수 있으므로 흉내라고 단정하기는 좀 그랬는데, 흑7과 백8, 흑9와 백10은 분명 흉내다. 흉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2도> 백22까지 흉내는 계속되었다. 우상귀와 좌하귀는 외목 눈목자씌움에서 출발하는 정석의 하나. 외목 눈목자씌움은 ‘대사백변(大斜百變)’이라 해서 변화가 수백 갈래고 도중에 함정이 곳곳이 있어 난해하기로 알려진 정석인데, 실전에 나타난 모습은 그중에서는 가장 간명한 절충. 실리와 세력의 확연한 갈림이나, 세력보다는 실리가 좀 낫다 해서 프로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흑23으로 좌상귀에 두칸높이 걸쳤을 때, 백이 지금까지처럼 똑같이 우하귀에 두칸높이 걸치지 않고, <3도> 백1로 받아주면서 흉내는 끝났다. 애초 흉내를 시도한 것치고는 의외로 선선히 전향한 것. 흑2로 밀어갈 때 백3으로 같이 밀고, 흑4, 6에 백5, 7로 대응하면서 좌상귀는 또 ‘큰밀어붙이기’, 옛날에는 ‘큰눈사태형(大崩雪型)’이라고 부르던 정석으로 환원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즈음부터 슬슬 사라졌다가 2000년대에 잠시 부활해 한동안 유행하며 새롭게 연구과제가 되었었다.
‘큰눈사태’라는 이름은 “일본 사람들이 후지산(富士山)의 눈사태를 연상하고 거기서 따온 것이니 우리는 ‘큰밀어붙이기’로 하자”는 주장도 예전에 있었지만, 글쎄, 실감은 ‘큰눈사태’가 괜찮으니 굳이 일본색을 강조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건 그런데, 아무튼 이 정석 과정에서 흑에게 실수(?)가 나왔다.
백13 단수에 흑14로 빠진 것이 그것. 단수쳤으니 나온 건데? 나오는 건 당연하나, 수순이 그게 아니라는 것. 실전은 <4도> 백16까지, 정석에서 전투로 곧장 이어졌는데, 이 흐름은 백이 좀 좋아 보인다는 것.
<3도> 흑14로는, 이렇게 나오기 전에 <5도>처럼 귀쪽에서 흑1과 백2를 먼저 하나 교환하고 3으로 나오는 것이 수순. 이하 흑13까지 흘러가는 것은 정형의 하나. 흑13으로는 보통은 A 자리로 두 칸 벌리는 것이지만, 지금은 주변 배석을 볼 때 이렇게 날일자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흑7로 백10 자리에 늘어가는 것도 있고. <5도>는 차후 상변 사정 여하에 따라서는 흑B로 젖혀 백C 때 흑D로, 패를 만들어 놓는 뒷맛이 있다. 뒷맛의 여부, 그게 실전과 <5도>의 차이라는 것. <3도> 흑14는 옛날에도 나왔던 수. 지금 100세를 바라보는 우칭위엔(吳淸源, 98) 9단이 젊었을 적에 후지사와 슈코(1925~2009) 9단과의 대국에서 “실수했다”고 전해지는 그것.
그런데 나현도 이 수순을 착각-실수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겠지. 검토실의 얘기는 두 가지. 알면서도 한번 시도한다는 연구심의 발로였으리라는 것이 하나. 또 하나는, 모를 리는 없지만, 상대의 흉내에 신경을 쓰다가 실수 아닌 실수를 했을지 모른다는 것. 바둑도 결국 나현이 불계패했다. 흉내도 작전이어서 뭐라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만 당하는 쪽에서는 어찌 됐든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 거꾸로, 바로 그래서 흉내가 작전일 수 있는 것이지만.
흉내바둑의 대가는 작고한 후지사와 호사이 9단이다. 호사이 9단은 후지사와 슈코의 조카로 여섯 살 연상이다. 옛날 프로기사들은 대개 그랬지만, 호사이 9단도 무지한 장고파였다. 흉내바둑을 두면서도 매수 장고를 했다. 흉내를 중단할 시점을 찾아서 말이다. 흉내의 허실을 학구적으로 규명하고 싶었던 것인지. 호사이 9단이 흉내의 대가이긴 했어도 원조는 아니다. 원조는 우칭위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9년, 우칭위엔 15세. 일본 바둑계의 발탁으로 일본에 건너온 중국의 천재소년은 당시 일본의 젊은 선봉이었던 기타니 미노루(1909~1975)와 시험기를 두게 되었는데, 흑을 잡고 첫 수를 천원에 두고 다음부터 63수까지 백을 따라 두었던 것. 기분을 상한 기타니는 몇 번이나 대국실 밖으로 뛰쳐나와 주최 측에 “저런 식으로 바둑을 두면 모두 곤란해지니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도 흉내바둑의 기록이 있다. 1969년, 지금은 없어진, 부산일보 주최 제11기 최고위전 도전기에서 그 시절 부산 바둑팬들이 열렬히 지지하던 부산 출신 강철민 5단(1939~2002)이, 조남철(1923~2006) 아성을 무너뜨리고 당대의 일인자로 군림하던 김인 7단(69)을 흉내바둑으로 이겨 타이틀을 쟁취했다.
그보다 더 생생한 것은 1980년 세모에서 81년 벽두를 장식했던 조훈현-서봉수의, 역시 지금은 없어진 중앙일보 주최 제15기 왕위전 도전5번기다. 그해 여름 조훈현은 서봉수의 ‘명인’을 빼앗음으로써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서봉수는 무관이 되어 변방으로 밀려났고 조훈현 제국은 이제부터 최소 10년은 철옹성일 것 같았다. 그해 불과 6개월 만에 서봉수는 다시 도전장을 들고 나타났다. 한 달 전쯤 일본에서는 조치훈이 ‘명인’을 쟁취, 그 인기가 한-일 양국에서 하늘을 찔렀고, 조-조를 비교하는 사람들의 설왕설래에 조훈현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봉수는 흑을 들고는 두 판을 졌지만, 백을 들고 흉내바둑으로 두 판을 이겼다. 2 대 2에서 다시 돌을 가리니 서봉수가 마치 운명처럼, 각본처럼 백. 서봉수는 흉내를 냈고, 바둑을 이겨 조훈현의 전관왕국을 허물면서 타이틀로 복귀했다.
“나는 조훈현의 초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초반을 비슷하게 짜면 중반 이후에는 다시 힘도 내볼 텐데… 조훈현의 초반 속도를 묶어 놓는 방법. 그게 흉내였다.” 서봉수의 후일담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