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학규 상임고문, 정세균 최고위원, 조경태 의원(왼쪽부터). |
‘정세균 캠프’는 “완전국민경선의 부작용을 방지하고 선거관리를 차질 없이 하기 위해서는 공직선거법 개정이 필수적이지만, 대선을 목전에 둔 19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선거법을 개정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현실”이라며 “법 개정 없는 완전국민경선제는 당의 신뢰와 도덕성을 훼손하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킬 가능성이 높고, 경선 때마다 지적돼 온 ‘동원 문제’도 해결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참여 국민의 양적 확대에 골몰해왔지만 이제는 질과 양을 동시에 추구하는 융합형 경선, 전문가를 포함한 시민평가단 방식의 검증을 통해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게 국민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진정한 흥행방식”이라며 ‘시민평가 배심원제’ 도입 필요성을 강조했다.
민주당 대선주자가 선거캠프의 공식 입장을 통해 대선후보 경선 룰에 대한 의견을 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욱이 그 내용이 ‘대의원, 당원, 일반 시민 구분 없이 1인1표’를 핵심으로 하는 완전국민경선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어서 충격파는 더 컸다. 이 때문에 이 보도자료는 민주당 내에서도 대선주자들 간의 ‘경선 룰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다.
대선후보 경선 룰을 둘러싼 주자들 간의 신경전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선 규칙이 어떻게 짜이느냐에 따라 최종 승자가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이명박 후보에게 패했을 때,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서 손학규 후보가 정동영 후보에게 패했을 때 그 결과를 두고 공통적인 분석이 나왔다. 박근혜 후보와 손학규 후보가 ‘투표에선 이겼지만 룰에서 졌다’는 것이었다. 현재 새누리당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후보가 ‘경선 불참’ 엄포까지 놓으면서 경선 룰 개정을 주장하는 비박(비박근혜) 3주자(김문수·정몽준·이재오)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있는 것도 5년 전의 악몽이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느 정당이건 대선후보 경선 룰을 정하는 게 치열한 신경전과 내부 갈등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 대선후보경선준비기획단(단장 추미애 최고위원)은 ▲7월 22일 대선후보 경선 등록 마감 ▲7월 29∼30일 여론조사(일반 시민 70% + 당원 30%)를 통해 후보를 5명으로 압축하는 예비경선 실시 ▲8월 25일 제주에서 첫 지역순회 경선 실시 ▲9월 23일 서울에서 마지막 지역순회 경선 실시 및 대선후보 확정 ▲본경선 기간 중 매주 일요일마다 1∼4차 모바일투표 결과 순차 발표 등을 골자로 한 경선 룰 잠정안을 마련했다. 본 경선은 대의원과 당원, 일반 시민 구분 없이 1인1표의 똑같은 가치를 인정하기로 했다. 투표 방식은 대의원의 경우 전원 후보선출대회장 투표로, 당원 및 일반 시민의 경우 모바일 투표와 현장 투표소 투표, 후보선출대회장 투표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세대별, 지역별 인구 보정은 따로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민주당 대의원이든,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대선후보 경선 선거인단으로 등록한 모든 사람들의 한 표를 똑같은 가치로 취급하겠다는 게 핵심적인 내용이다. 물론 모바일투표로 한 표를 행사하든, 먼 길을 차를 타고 가서 후보선출대회장 투표에 응하든 한 표의 가치는 똑같이 취급된다. 기획단 간사를 맡고 있는 오영식 당 전략기획본부장은 “지난 2002년 대선 이후 후보 선출 과정에 국민의 참여를 늘려왔던 만큼 완전국민경선제는 이제 하나의 대세로 굳어졌다”며 여론조사나 시민배심원제 등 여타 방식을 가미하거나 당원 및 대의원의 한 표에 가중치를 부여할 계획이 없음을 시사했다. 오 본부장은 또 “300만 명 이상의 선거인단이 참여하는 완전국민경선제에선 세대별, 지역별 보정은 불필요하다는 게 기획단 위원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경선 룰은 어디까지나 기획단이 만들어 놓은 잠정안일 뿐이다. ‘선수’들이 ‘게임의 규칙’에 합의하지 않는 한 경기가 시작될 수는 없다.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 가급적 많은 국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경선 효과’를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민주당 대선주자들을 띄워야 한다는 데에는 당내에서 별 다른 이견이 없다. 대선을 5개월여 앞둔 현재까지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지지도가 박근혜 후보는 물론 아직까지도 장외에 머무르고 있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도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대선후보 경선이 각 대선주자들은 물론 민주당에게도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처럼 절박함은 모든 대선주자들이 공유하고 있지만 경선 룰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면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각 주자들이 경선 룰을 놓고 유·불리를 따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내에선 경선 룰 협상이 난항을 겪을 가능성에 주목, 벌써부터 “기획단이 세워놓은 스케줄대로 경선이 진행될지 의문”이라는 회의론이 나오고 있다.
각 대선주자들의 경선캠프 기류를 종합하면 기획단이 마련한 잠정안에 대한 불만은 그야말로 ‘A에서부터 Z까지’다. 우선 경선 기간부터 논란이다. 기획단은 “경선 기간이 한 달을 넘어설 경우 위탁 관리가 어렵다”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경선 기간을 8월 25일∼9월 23일로 잡았다. 지난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에도 29일 동안 경선을 진행했다는 점도 고려됐다.
그러나 손학규 상임고문 경선캠프는 “각 주자들을 검증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입장이다. 노무현 후보와 이인제 후보가 격돌했던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와 달리 이번엔 문재인 상임고문과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등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후보들이 많기 때문에 경선 기간을 길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손학규 캠프의 한 관계자는 “제대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후보를 선출했다가 안철수 원장과의 후보단일화나 대선 본선에서 문제점이 드러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며 “경선을 서두르는 것은 너무 위험한 도박”이라고 말했다. 여기엔 도지사와 장관, 당대표 등을 거치며 그야말로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다 겪은 손 고문 측의 자신감이 배어 있다. 손 고문 스스로 “이번 대선에선 이미지가 아닌 콘텐츠로 경쟁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정세균 상임고문이 시민배심원제 카드를 들고 나온 것도 손 고문과 마찬가지로 ‘검증된 자의 자신감’을 반영한다. 정 고문도 장관과 당 원내대표, 당대표 등 풍부한 경험과 정책적 식견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선 1% 남짓한 지지도에 머물고 있는 처지다. 여론조사 결과와 비슷한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완전국민경선제로 경선이 진행될 경우 승산이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민배심원제가 도입될 경우 배심원들이 상대적으로 꼼꼼하게 후보들의 이력과 정책 능력 등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정 고문으로선 반전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예비경선을 통해 본선 후보를 5명으로 압축하는 컷오프에 대해서도 반발이 나온다. 조경태 의원은 기획단의 컷오프 방침에 대해 “인지도가 낮은 정치신인은 아예 경선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며 “이는 명백한 불공정 경선”이라고 주장했다. 조 의원은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에도 7명의 후보가 예비경선 없이 참여해 성공적인 경선을 치렀다”고 주장했다. 예비경선에만 참여해도 후보 1인당 1억 원이 넘는 기탁금을 내야 하는 만큼, 일반 여론조사에서 상대적으로 밀리는 김영환 의원 등도 이 같은 주장에 가세할 가능성이 높다.
본 경선에서 1위를 차지한 후보의 득표율이 50%를 넘지 못할 경우 1위와 2위 후보만으로 결선투표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두관 전 지사 경선캠프의 핵심 인물인 민병두 의원, 손학규 고문 경선캠프에 참여한 조정식 의원 등이 이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은 “새누리당에선 박근혜 후보가 70∼80%의 지지를 얻어 대선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은데, 민주당 후보가 30∼40%의 득표율로 대선후보가 된다보로본선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대선후보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라도 결선투표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선후보가선투표제 도입 주장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상임고문을 제외한 모든 대선주자들이 내심 공감을 표하고 있다. 문 고문이 속한 친노(친노무현)그룹에 대한 반감이 당내에 상당한 만큼, 문 고문과 1대1 대결을 펼친다면 승산이 있다는 계산을 깔고 있는 것이다.
경선 기간부터 결선투표제에 이르기까지 쏟아지는 아이디어들은 모두 ‘약자의 아이디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정작 여론조사 1위인 문재인 고문 측은 경선 룰에 대해 “가급적 많은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극히 원론적 입장만 내놓을 뿐이다. 기획단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완전국민경선제 방식이 문 고문에게 결코 불리할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약자의 아이디어’ 외에도 기획단의 잠정안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특히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표의 가치’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획단의 잠정안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대의원이든, 당원이든, 일반 시민이든 이들의 한 표는 모두 똑같은 가치를 갖게 된다. 또 투표를 모바일투표로 하든, 전국 시·군·구에 하나씩 설치되는 현장투표소에서 하든, 후보선출대회장 투표에서 하든 그 가치 역시 똑같다.
호남 지역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과거 선거 결과를 보면 모바일투표의 투표율이 80%를 넘어서는 반면 현장투표의 투표율은 30%에도 못 미친다”며 “고령층이 모바일투표에 익숙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기획단의 잠정안대로 경선을 치를 경우 젊은층의 의견은 과잉 대표되는 반면 고령층의 의견은 과소 대표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 의원은 “기획단의 잠정안대로 경선을 치른다면 이미 검증이 됐고, 안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손학규·정세균 고문이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른바 ‘디지털 격차’로 인해 표심이 왜곡될 수 있는 만큼 세대별 보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한 최고위원은 익명을 전제로 “2∼3시간씩 차를 타고 투표소에 찾아가서 행사한 한 표와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행사한 한 표의 가치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 또 당의 주인인 대의원 및 당원의 한 표와 일반 시민의 한 표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당연히 논란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최고위원은 “현장투표와 대의원·당원 투표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7월 12일쯤부터 기획단 회의에 각 대선주자의 대리인들을 참여시킬 계획이다.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놓고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경선 룰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면 그 합의안이 최고위원회의에 보고되고, 이후 당무회의 의결을 거쳐 최종적인 경선 룰로 확정된다. 민주당의 본격적인 ‘룰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