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증책임 제조사에 전환하는 ‘도현이법’ 발의 눈길…소송 남발 부작용 우려도
제조물 결함이나 사과 관련 입증은 현행법상 피해자인 소비자가 해야 한다.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은 블랙박스 영상을 제출했지만, 간접증거로 활용될 뿐 급발진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 소비자가 급발진 원인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우며 급발진으로 인정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기에 제조사에도 입증책임을 지는 개정안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13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 766건…인정은 0건
허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3월 23일 한국도로교통공단으로부터 받은 ‘연도별 국내 급발진 의심 차량 신고 현황(2010~2022년)’에 따르면 지난 13년 동안 급발진 의심 사고 건수는 766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단은 2010년부터 지금까지 자동차 제작결함 의심 사례를 신고하는 '자동차 리콜센터'를 통해 급발진 신고를 접수한 차량을 전수조사하고 있다. 하지만 급발진으로 확인된 사례는 단 한 번도 없다.
법원에서 급발진을 증명해 원고 측에서 승소를 거둔 경우도 거의 없다. 2001년 8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급발진 사고 차량의 보험사인 삼성화재보험이 기아자동차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 소송 1심에서 재판부는 “기아차는 원고에게 1180만여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02년 8월에 진행된 2심에서 재판부는 “인명손실이 없기 때문에 제조물책임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원고인 삼성화재보험에 패소 판결을 했다. 같은 해 12월에 진행된 3심에서는 기각 결정됐다.
2018년 5월 호남고속도로 부근에서 발생한 ‘BMW 급발진 사건’만이 2심 재판에서 승소 후 대법원의 최종 결정을 기다리는 상태다. 1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이 났지만, 2심에서 재판부는 “(차량은) 다른 자동차가 달리지 않는 갓길로 주행했고 비상경고등이 작동되고 있었다”며 “운전자가 정상적으로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던 상태에서 자동차의 결함으로 생긴 사고로 판단된다”고 설명하면서 BMW코리아가 유가족 2명에게 각 4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ECU에 사고 흔적 없어…EDR로도 급발진 규명 한계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생산된 차들이 급발진하는 원인은 그 시점부터 부착된 전자제어장치(ECU)에 결함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 교수는 “급발진 사고가 난 이후에는 재연이 불가능하고 사고 흔적이 남지 않는다”며 “국과수 등 수사기관에서도 장치에 이상이 없다고 발표하는 이유가 이러한 점 때문”이라고 밝혔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겸임교수는 “급발진 현상은 있지만, 그 원인은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라며 “수사 기관은 가속페달·브레이크페달 조작 상태 등이 기록된 EDR(사고기록장치)를 통해 사고를 분석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만으로 급발진을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권 교수는 “소비자 입장에서도 급발진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제조사에도 급발진 등 차량 결함이 없다고 증명하게 해 책임을 지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디스커버리'처럼 제조사에도 입증책임을"
급발진이 정식 인정되지 않아 소비자가 보상 받지 못한 일만 생기자, 입증책임을 제조사에도 부여하자는 의견이 많아졌다. 특히 2022년 12월에 발생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의 유족이 국회 국민동의 청원을 올려 급발진 의심 사고로 인한 사실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전환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일명 ‘도현이법’을 발의하면서 이목이 쏠렸다.
도현이법을 공동 구상한 하종선 변호사(법률사무소 나루)는 “급발진의 원인은 전자제어장치 소프트웨어 결함 때문인데, 이를 입증하려면 소프트웨어 소스 코드를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하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로 소스 코드를 공개하지 않는 실정”이라며 “미국의 ‘디스커버리’처럼 입증책임을 제조사에도 전환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자동차 업계는 입증책임 전환 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 관계자는 “입증책임을 제조사에 전환하면 불필요한 분쟁과 소송 남발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EDR을 통해 과학적으로 원인을 분석하고, 첨단 안전장치 장착 지원 및 의무화 등 사고 예방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영현 기자 nogo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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