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옥수 신창원이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뒤 무척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진은 1999년 7월 16일 붙잡힌 모습. 일요신문 DB |
신 씨는 올 2월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해온 경북북부교도소(구 청송교도소)를 떠나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는 단신을 끝으로 소식이 끊겼다. 잊힐 만하면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로 뉴스메이커에 올랐던 신 씨였기에 그의 소식이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와중에 기자는 최근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한 박 아무개 씨와 신 씨의 후배 A 씨를 통해 신 씨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자살기도 후 심신을 추스른 신 씨가 마음의 안정을 찾고 성실한 태도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살 소동을 벌였던 신창원에 대한 마지막 뉴스는 전주교도소 이감 소식이었다. 전주교도소 측은 이감 이유와 관련해서 “신 씨가 고향인 김제에서 가까운 전주교도소로 오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라고만 밝혔다. 하지만 단지 신 씨의 요구만으로 ‘한국의 알카트라스’로 불리는 경북북부교도소를 떠날 수 있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희대의 탈옥수로 불리는 신 씨는 십수 년간 특별감시를 받아온 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간 신 씨는 수차례 ‘청송’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피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최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박 씨는 신 씨의 이감과 관련된 뒷얘기는 물론 신 씨의 근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줬다. 박 씨와 몇몇 재소자들에 따르면 신 씨가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것은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날짜보다 훨씬 전인 지난해 12월이라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 씨는 “전주교도소는 청송만큼 보안이 심하지 않았다. 원래 사동과 운동장 사이에 철조망도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신창원이 온다는 얘기가 들리더라. 순간 교도소는 비상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날에도 교도소 측에서는 철조망을 만들고 통방을 못하도록 가림막을 세우고 난리였다. 경비도 엄청 강화됐다”고 회고했다.
교도소 측에서 신 씨의 이감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신 씨의 이감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비록 몇 개월에 불과했지만 오랜 수감생활 동안 신 씨는 다양한 이유로 경북북부교도소를 떠나 대구교도소와 대전교도소 등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 신 씨의 이감 때마다 관련 교도소 측에서는 “이감은 신 씨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다. ‘요주의 인물’들 위주로 6개월~1년마다 적절한 수용기관으로 옮기는 수용 처우상 이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신 씨는 이감하자마자 얼마 안 돼 다시 청송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느 교도소에서도 신 씨를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도소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신창원은 청송 외에는 갈 곳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신 씨의 전주 이감에 재소자들이 큰 관심을 보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신 씨는 교도소 측에는 요주의 인물이자 골칫덩이였지만 재소자들의 입장에서 그는 ‘밉상’은 아니었다고 한다. 신 씨는 서신검열 및 발송제한, 치료기회 박탈 등을 문제 삼아 국가와 교도소장을 상대로 한 소송을 제기해 일말의 성과를 얻어낸 바 있다. 신 씨의 거침없는 소송은 언론플레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분명 재소자 인권 및 처우개선에 일조한 점이 있었던 것이다.
박 씨는 “신 씨가 온다는 소식에 재소자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자살기도가 이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폐쇄적인 장소에 신 씨를 더 이상 방치했다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감 요구를 들어줬다’는 얘기도 있었다. 1하, 1상, 5하에 독거사동이 있는데 신 씨가 어디로 올지도 관심사였다. 큰 방이 있는 5하가 유력하다고 생각했는데 신 씨는 1하에 수감됐다. 추울까봐 특별히 보일러 판넬도 깔아줬다”고 전했다.
신 씨로 인해 교도소 내에서는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박 씨는 “전례 없이 경비가 강화된 것 외에도 신 씨가 자살기도시 사용됐던 ‘고무장갑’이 주요 단속물품이 됐다. 한동안 고무장갑을 아예 안 팔았다. 또 전례 없이 무기수 전체를 상대로 가족 접견도 이뤄졌다. 신 씨처럼 자살기도를 하는 무기수들이 없게 하려는 처사였다”고 말했다.
기자를 놀라게 한 것은 전주교도소에 이감된 신 씨가 현재 무척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재소자들과 어울려 달리기와 족구를 할 정도로 신 씨의 수감 생활은 이전과 큰 차이가 있었다.
신 씨의 최측근 A 씨를 통해 확인한 근황도 박 씨의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A 씨는 7월 1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자살 소동까지 벌여 걱정이 많았는데 전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심신의 안정을 찾은 것 같다”며 “틈틈이 사람들과 대화도 가능하고 매일 어울려 운동을 할 수 있는 생활이 도움이 된다고 얘기하더라. 수감생활을 착실히 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번 피력했다”고 강조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
“3년형인 날 흉악범과 수감”
지난 7월 중순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박 씨는 수감 기간 동안 자신이 겪은 심각한 피해에 대해 폭로했다. 박 씨는 “3년을 선고받은 나는 악질 무기수 2명이 있는 방에 수감됐다. 이들은 방에 수감자를 골라서 받을 정도로 교도관 못지않은 무소불위 권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내 앞에서 불법으로 만든 흉기로 마구 자해를 가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장기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다.
박 씨가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전주교도소 측의 태도 때문이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인권위에 진정까지 넣었지만 기각됐고 교도소 측은 재차 거듭되는 신고에도 가벼운 징벌처분만 내렸다.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고 했는데도 소용없었다. 교도소 측은 내가 엄청난 시달림과 폭행을 당하고 있음을 알고도 묵인했고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했다. 언론사에 제보하려고 했지만 매번 서신도 검열해 막았다. 무기수들을 잘못 건드릴 경우 자살소동 같은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젊은 재소자가 매번 초죽음이 되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박 씨의 주장이다.
교도소 측의 방관으로 박 씨는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해야했고 현재 20대 중반도 안 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후유증을 호소하고 있다.
현재 박 씨는 무기수 2명과 전주교도소를 상대로 법적 소송 및 일인시위를 준비 중이다. 그는 “경범죄자를 흉악범들과 동시 수용하는 것은 큰 문제다. 격리수용만 해줬어도 내가 3년 동안 이처럼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전주교도소는 재소자의 항문까지 들여다보는 불법 ‘알몸 검신’으로 얼마 전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는 등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따라서 박 씨가 법적소송을 진행할 시 적잖은 파문이 예고된다.
하지만 교도소 측은 “인권위 진정을 넣었다면 분명 정확한 조사가 이뤄졌을 것이고 그에 합당한 처분이 내려졌을 것이다. 재소자 간 이뤄진 폭행을 교도관들이 묵인했다는 등 박 씨의 주장은 확인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라고 반박했다.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