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는 원래 부산에서 원양어선을 타던 선원이었다. 지난해 3월 박 씨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출항 준비를 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고로 손가락을 다치면서 배를 타지 못하게 됐다. 치료를 위해 부산의 한 병원에 입원한 박 씨는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 A 씨와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간호를 위해 병원을 자주 찾던 A 씨의 아내와도 가까워졌고 우연히 독신녀로 살고 있던 처제 김 아무개 씨(여·45)의 존재도 알게 됐다. 이때부터 박 씨는 자신을 500억대 회사자금을 보유한 대기업 회장으로 소개하며 기가 막힌 사기극을 펼쳤다.
선원에서 대기업 회장으로 변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박 씨는 서류를 조작해 순식간에 서울 강남동 삼성동에 본사가 있는 ‘대산기업’ 회장님이 됐다. 부산이 연고지인 A 씨의 가족이 서울 사정을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한 것이었다. 예상대로 박 씨가 내미는 조작된 서류만을 본 A 씨의 가족은 그를 대산기업 회장님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특히 원양어선을 타면서 모아둔 돈을 흥청망청 써대며 자산가 행세를 하는 박 씨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분 세탁을 한 후 박 씨는 김 씨를 상대로 본격적인 사기극에 들어갔다. 별거 중인 부인과 자녀까지 있었지만 독신녀인 김 씨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박 씨는 기혼자임을 철저히 숨겼다. 박 씨는 자신의 성공을 위해 결혼도 포기한 야망 있는 남자로 포장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일은 박 씨의 계획대로 진행됐고 두 사람의 관계는 결혼 얘기가 오갈 정도로 진전됐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김 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확신이 든 박 씨는 본색을 드러냈다. “직원들 급여를 줘야하는데 현금이 부족하다”는 거짓말로 김 씨에게 수천 만 원씩 돈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 씨를 뒤늦게 만난 인연이라 믿었던 김 씨는 주저 없이 돈을 건넸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회사에 새로운 장비를 들여놔야 하는데 잔금 치를 돈이 부족하다”며 돈을 받아 챙기는가 하면, 부동산 투자를 미끼로 2억여 원을 요구했다. “확실한 물건인데 자금이 부족해 고민이다. 투자하는 사람이 있으면 수익금을 나눌 수도 있다”며 김 씨의 언니까지 끌어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김 씨는 돈을 갚으라는 독촉조차 하지 않았다. “금방 돌려주겠다”는 박 씨의 말을 믿은 데다가 어차피 곧 결혼할 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차례에 걸쳐 김 씨 자매에게 5억 원을 뜯어낸 박 씨는 이미 부산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박 씨는 부산에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홀연히 사라진 박 씨는 지난해 9월 서울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인터넷통신 가입대행업체 사장으로 깜짝 변신했다. 자신의 실체를 아는 이들이 없는 서울은 사기극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신분조작을 마친 박 씨는 고급 인맥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치과와 성형외과를 찾아갔다. 박 씨는 주기적으로 치과진료를 받고 호감을 주는 인상을 위한 시술을 받으면서 의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신뢰를 얻기 위해 박 씨는 시장 명의의 확인서를 위조하거나 거짓 부동산매매계약서를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박 씨는 본인이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 씨의 실체를 뒤늦게 알게 된 김 씨가 신고를 한 것이었다. 이에 박 씨는 얼굴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심했다.
특히 재력 있는 여성에게 투자 명목으로 거액을 뜯어내기로 계획한 박 씨는 재력과 품위를 겸비한 ‘기업가 얼굴’로 성형수술을 감행했다. 날카로운 인상이었던 박 씨는 수술 후 둥글둥글한 얼굴형에 짙은 쌍꺼풀을 가진 전형적인 중년의 기업가 이미지로 변신해 있었다. 박 씨의 사기본능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페이스오프’ 이후 박 씨의 사기행각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특급호텔에 기거하며 운전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박 씨는 누가 봐도 잘나가는 사업가였다. 재력 있는 여성들을 물색하던 그는 친분을 쌓은 의사들을 통해 3명의 중년여성을 소개받았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박 씨는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의 전도유망함에 대해 피력하는가하면 소개해준 의사와 함께 만나기도 했다. 또 처음부터 무리하게 거액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결국 박 씨는 3명의 여성으로부터 사업자금 등 차용명목으로 2억 원 상당을 챙기는 데 성공한다. 뒤늦게 피해 사실을 알아차린 여성들이 박 씨의 행방을 찾아 나섰지만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돈을 뜯어낸 박 씨는 이후 또 다른 범행대상을 물색하고 있었지만 지난 1월부터 신고를 받고 박 씨를 추적해오던 경찰에 의해 결국 지난 7월 10일 서울 삼성동의 한 호프집에서 체포됐다. 피해여성들은 경찰조사에서 “의사를 통해 박 씨를 소개받았기 때문에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차 한잔을 마실 때도 호텔 커피숍을 찾는 등 누가 봐도 잘나가는 중년신사였다”고 혀를 내두른 것으로 전해진다.
나주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체포 당시 박 씨는 주민등록상의 얼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을 합성해놓은 얼굴이었다”며 “도피 중에도 계속해서 사기행각을 벌여 온 점을 미루어 또 다른 피해자와 추가 여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