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임 9개월을 맞는 박원순 시장(왼쪽)의 정책 방향이 오세훈 전 시장의 흔적 지우기에 치중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
최근 5개월에 걸친 서울시 감사결과 세빛둥둥섬 사업이 총체적 부실사업임이 드러나자 지난 7월 18일 시민단체들은 오 전 시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것을 밝혔다. 반포대교 남단 9995㎡ 규모의 수상 인공섬인 세빛둥둥섬은 오 전 시장이 한강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1390억 원을 들여 만든 수상복합시설이다. 하지만 서울시 감사관실은 감사결과 ▲사업자 귀책 해지 시 해지시지급금을 지급한 점 ▲총사업비를 662억 원에서 1390억 원으로 2배 이상 증액한 점 ▲무상사용기간을 20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한 점 등을 적발했다. 또 위에서 지적한 계약상의 불공정·부당 조항을 비롯해 세빛둥둥섬 조성 과정의 11가지의 문제점도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박 시장이 출마 전부터 세빛둥둥섬을 ‘전시성 토건사업’으로 지목하며 사업조정 대상 1순위로 꼽았다는 사실이다. 서울시는 이번 감사결과를 바탕으로 사업 관련 공무원 15명에게 중·경징계조치 방침을 밝혔는데 이와 관련된 뒷말도 나오고 있다. 서울시 한 간부급 인사는 “시장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른 실무자를 처벌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이러니 오 전 시장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게 아니겠느냐”라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췄다.
문제는 이미 폐기됐거나 손질 수순을 밟고 있는 오 전 시장의 정책들이 세빛둥둥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세훈표 한강 도시계획’은 환경의 조화 및 복지를 중시하는 박 시장이 취임한 이후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오 전 시장과 박 시장의 업무 스타일이나 정책 지향점이 판이하게 다른 이유도 있지만 현재까지의 분위기라면 일부 정책에 대한 제동을 넘어 새판짜기 냄새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출마 전부터 오 전 시장의 개발패러다임에 첨예한 각을 세워온 박 시장이 본격적으로 오 전 시장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얘기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박 시장의 정책행보를 둘러싸고 심심찮게 정치적 해석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박 시장이 작정하고 ‘갈아엎기’를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박 시장 임기가 끝나는 2014년 6월 무렵 서울시에 오 전 시장의 흔적이 남아있을지 의문”이라는 얘기까지 들린다. 실제로 서울시 한 관계자는 “앞으로도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서울시 부채가 25조 원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전면 재검토해야할 사업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다. ‘탈 오세훈’ 정책은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박 시장은 지난 6월 재건축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강남과 여의도 등을 중심으로 한 오 전 시장의 개발안을 뒤집고 ‘2030 서울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할 뜻을 밝혔다.
▲ 세빛둥둥섬과 한강예술섬 조감도. |
오 전 시장이 추진했던 역세권 시프트(장기전세주택) 사업도 사실상 퇴출된다. 오 전 시장은 임대주택 공급확대를 위해 역세권 시프트를 도입했으나 박 시장은 강남역 목동역 청량리역 등 역세권 40곳에 시프트 건립을 제한하는 규칙을 개정했다.
오 전 시장이 그린정책 중 하나로 추진했던 자전거도로도 박 시장 체제하에서는 미운오리새끼로 전락한 분위기다. 서울시는 6월말 교통체증, 사고위험 등으로 애초부터 무용론에 시달렸던 광진구 군자역에서 어린이대공원역 방향에 조성돼 있던 900m 구간의 자전거도로를 뜯어내고 자동차전용도로로 원상복구하는 대대적인 수술에 들어갔다.
재임 당시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고 손수 밑그림까지 그려가며 ‘서울 순환 자전거 전용도로 구축’ 계획을 내놨던 오 전 시장으로서는 더없는 굴욕일 수밖에 없다.
박 시장은 지난 해 상반기 오 전 시장이 야심차게 발표했던 한강르네상스 전략정비구역 사업에도 메스를 들이댔다. 여의도 주거지역을 상업지역으로 용도변경해 70층짜리 주상복합빌딩 3개동 등을 건설하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하는 이 사업은 오 전 시장의 청사진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마스터플랜이자 한강르네상스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박 시장은 경관 관리 등을 이유로 오 전 시장이 꿈꿨던 한강변 초고층 랜드마크 건립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안 그래도 과도한 기부채납 비율과 800%가 넘는 용적률 등으로 인해 오 전 시장의 개발안에 대해 해당 주민들의 반발이 거셌던 터에 박 시장의 백지화 결정은 오 전 시장의 자존심을 제대로 건드렸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오 전 시장이 추진했던 도심 관광호텔 확대사업도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오 전 시장은 2010년 자연경관지구로 규제에 묶여있던 남산과 북한산, 북악산 등 일대에 관광호텔 신축 또는 증축을 허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또 지난해 5월 도심지에 관광호텔 건립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시유지인 삼성동 서울의료원 강남분원 용지, 녹번동 질병관리본부 용지, 공덕동 한국산업인력공단 용지 일부를 관광호텔로 포함시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최근 박 시장은 여기에도 제동을 걸었다. 박 시장은 7월 19일 제179회 경총포럼 초청 강연에서도 “서울은 아파트 위주의 고층 중심 개발계획이 어울리지 않는다”며 오 전 시장의 도시계획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오 전 시장의 ‘굴욕’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울시가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하던 강남순환고속도로와 서부간선지하도로, 평창터널 사업들도 일제히 연기되고 있다. 9호선 요금 인상 문제로 민자 사업에 대해 전면 재검토 방침을 밝힌 서울시는 7월 21일 총 사업비 1조 9550억 원 규모의 민자 사업인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의 완공 시기를 당초 2014년에서 2016년으로 늦추겠다고 발표했다.
오 전 시장은 2007년 7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기공식에 참석하는가하면 직접 굴착현장에 들러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등 사업에 유독 애착을 보인 바 있다. 서울시는 또 우이동-신설동의 경전철 사업과 용마터널 건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 입장을 발표했다.
뿐만 아니다. 4900여 억 원을 들여 추진했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도 제동이 걸렸다.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6만 5232㎡)에 복합 문화시설을 표방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시민 디자인의 장’으로 바꾸라는 박 시장 주문으로 인해 개관일이 1년이나 연기됐다.
오 전 시장 시절 추진된 사업 중 절차상 하자가 있거나 규정을 위반한 내용도 줄줄이 드러나 오 전 시장을 코너로 몰아가고 있다.
감사원은 오 전 시장 시절 721억 원을 들여 만든 광화문광장 도로가 설계상의 잘못으로 침하·파손됐음을 지적했다. 또 2009년 6월 준공한 어린이대공원 ‘디자인서울갤러리’ 공사 당시 부적격업체와 계약을 맺어 특혜를 주는 등 건설산업기본법을 위반한 것도 적발했다.
하지만 오 전 시장의 정책에 대해 대대적인 손질에 나서고 있는 박 시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잖다. 서울시 사정에 밝은 한 여권 인사는 “박 시장은 무조건 이명박·오세훈 전임 시장들의 정책노선에서 벗어나려는 듯한 느낌을 풍긴다. 그러다보니 전 시장의 사업 정리에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다. 뭔가 균형을 잃은 느낌이다”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언론 인터뷰 내용만 봐도 박 시장은 퇴임 1년이 다 되어가는 오 전 시장을 물고 늘어지면서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느낌을 준다. 특히 시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책에 연결성이 끊어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는 의견을 보였다. 실제로 허광태 전 서울시의회 의장은 “보여주기식 토목사업은 없애야 하지만 도로, 교통시설 등 시민들의 삶과 직결되는 사업은 계획대로 추진해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정치가 아닌 정책을 고민하는 시장을 원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