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올림픽 사격 금메달리스트인 진종오(왼쪽)와 김장미가 지난 8일 오후 영종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런던 현지에서 활동 중인 김병현 연구원은 전화 연결 인터뷰 첫마디부터 기자를 놀라게 했다.
“오늘 열리는 사격 경기에서 김장미가 큰일을 낼 것이다.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금메달 딴다. 두고 봐라(웃음).”
인터뷰 당시는 여자 25m 권총 종목에 출전하는 김장미(20·부산시청)가 예선을 치르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예선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고 결승에 오른 김장미가 깜짝 금메달을 따냈다. 김 연구원은 오랜 시간 동안 선수들과 함께했고 그들을 연구했기 때문에 선수들의 경기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 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사격 종목을 전담하고 있는 김 연구원은 런던올림픽을 대비해 선수들과 체계적인 심리훈련을 소화했다고 한다. 기본 심리훈련을 시작으로 올해에 집중력 강화 훈련을 실시했고 시합 전에 필요한 ‘마음 비우기 훈련’과 시합 중에 생기는 ‘실수 받아들이기 훈련’ 등을 통해 선수들의 마인드컨트롤 능력이 크게 향상됐단다.
김 연구원은 한국의 런던올림픽 첫 메달을 안겨준 진종오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진종오가 런던으로 출발하기 전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올림픽 2연패 달성의 압박감과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그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한 복안으로 독서를 추천했고 본래 독서가 취미였던 진종오는 시합 전 <일만시간의 법칙>과 <와칭>이란 책을 읽으며 심리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
역도 대표팀을 13년간 연구하고 지켜봐 왔다는 문영진 연구원은 런던 현지에서 연구원 활동을 총괄하고 지원하는 책임까지 맡고 있다. 대표팀을 현지에서 지원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다고 밝힌 문 연구원은 연구원들의 원활한 현지 활동을 위해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지 연구원들은 브루넬 대학교에서 거처하고 있는데 선수촌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왕복 4시간 거리다. 연구원들에게 할당된 선수촌 ID카드도 2장밖에 없어, 6명의 연구원이 돌아가며 선수촌을 방문하는 실정이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선수들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연구원들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연구원들이 수년간 연구한 결과와 지원 활동의 결실이 올림픽 메달로 증명되고 있다는 문 연구원은 앞으로는 스포츠과학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스포츠 과학교실’이라는 프로그램을 연구원에서 주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데 이 자리에서 선수들과 지도자들에게 설문을 한 결과, 스포츠과학이 스포츠 경기 전체의 10~20% 정도를 차지한다고 대답했다. 작은 부분에서 승부가 갈리는 스포츠 경기에서 스포츠과학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몸소 피부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 성봉주 실장. |
“배드민턴 혼합 복식 종목에 이용대와 함께 출전한 하정은은 신장과 체격이 큰 유럽 남자 선수들을 심리적으로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혼합 복식의 경우 상대적으로 여자 선수의 기량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대 여자 선수를 공략해야 하는데 하정은은 남자 선수를 공격하다가 시합에서 패하는 경우가 많다. 하정은의 유럽 남자 선수 공포증도 연구원들이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줘야 한다.”
▲ 배드민턴 혼합 복식에 출전한 이용대와 하정은. 연합뉴스 |
“체육과학연구원이 생긴 이래로 신기하게도 연구원들과 가족같이 지냈던 종목의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왔다. 전 수영대표팀 감독이었던 노민상 감독은 연구소에 자주 방문해 연구원들의 연구 결과와 조언을 귀담아 들었고 박태환은 생리학을 전공한 송홍선 연구원의 측정과 평가를 토대로 운동처방을 성실히 이행해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냈고 런던에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성 실장은 육상, 배드민턴, 농구, 바이애슬론 종목을 집중 연구하고 있는데 이번 올림픽 배드민턴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정재성(30)-이용대(24·이상 삼성전기)조가 성 실장에게 체력과 기술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정재성은 원래 공격형 선수이기 때문에 스매싱 속도가 299km 정도가 나온다. 베이징올림픽 당시만 해도 이용대는 수비형에 가까운 선수라서 스매싱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체력 측정과 지속적인 근력 강화훈련 덕분에 어깨 파워가 향상돼 지금은 스매싱 속도가 286km까지 나올 정도로 빨라져 복식 경기에서 다양한 포메이션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됐다. 지속적으로 지구력 강화와 체력 보강에 집중한 결과 경기 후반 체력도 좋아졌다.”
한편 올림픽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무명의 선수들이 깜짝 메달을 따내 함께 고생했던 동반자로서 몹시 기쁘다는 성 실장은 반면에 불공정한 판정으로 메달을 빼앗긴 몇몇 선수들을 보고 연구원으로서 가슴이 아팠다고 밝혔다.
“연구원을 포함해 선수와 지도자 모두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질 때는 연구원도 안타깝고 부당한 판정으로 패할 때는 가슴이 아프다. 그들이 흘린 소중한 땀과 노력들이 스포츠 현장에서 정당하게 대우받지 못하고 잊히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성 실장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지도자나 선수들이 바라보는 스포츠과학 연구원은 그저 기록을 분석해주고 영상자료 등을 제공해 주는 기술자나 다름없었다고 푸념했다.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이 경기분석가와 체력트레이너를 현장에 고용해 월드컵 4강에 오른 이후 많은 한국 체육 지도자들이 스포츠과학 전문가의 필요성을 깨달았고 스포츠의 전문화와 분업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고 성 실장은 회상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 성장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스포츠과학을 보는 인식의 틀을 바꾸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체육 지도자가 선수에게 필요한 모든 부분을 지도해 주는 시대는 지났다. 지도자는 숲과 나무를 동시에 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스포츠과학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지도자가 할 수 없는 과학적 측면의 지원을 해 주어야 하고 이러한 노력이 스포츠의 선진화, 과학화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체육과학연구원은 1980년 설립 이래로 스포츠과학의 현장 적용을 통한 종목별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고 대표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큰 힘을 주었다. 80년대 이후 줄곧 한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일본은 2000년에야 뒤늦게 4500억 원의 전폭적인 재정지원을 받아 일본체육과학연구원을 설립했다. 올림픽에서 미국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한 중국 또한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중국체육과학연구원을 중심으로 스포츠과학 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성 실장은 일본, 중국을 포함한 많은 스포츠 강대국들이 스포츠과학 발전에 힘쓰고 있는데 반해 한국 체육과학연구원의 규모는 줄어들고 있어 정부의 꾸준한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한 종목의 전문가가 되는 데 짧게는 5년, 넉넉잡아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현재 23명의 연구원이 4종목 이상을 담당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각 종목별로 전문적인 지원을 하기에는 인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 정부가 지원해주는 전체 연구원 현장 지원규모도 1년에 1000만 원 수준이다. 또한 스포츠과학 연구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전문화된 연구 인력과 장비의 첨단화가 필수인데, 다행히 올해와 내년에 기획재정부 지원으로 40억 원 정도의 첨단 과학 장비가 들어올 예정이다”
선수가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열린 스포츠과학 마인드가 꼭 필요하다는 성 실장은 마지막으로 스포츠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서 삼위일체가 맞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선수나 지도자가 연구원을 불편한 존재로 여겨서는 성공할 수 없다. 지도자가 하는 역할과 연구원이 하는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선수, 지도자, 연구원 이렇게 셋이 비빔밥처럼 조화를 이뤄야 올림픽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연구원을 자주 괴롭히는(?) 지도자와 선수가 항상 금메달을 딴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지도자와 선수가 연구원을 신뢰하고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몸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차인태 기자 cit0207@gmail.com
▲ 체육과학연구원 근기능 역학 실험실에서 ‘3차원 척추 안정화 운동시스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기술·심리·체력…전방위 지원
1980년 설립된 대한체육회 산하 스포츠과학연구소가 현 KISS(Korea Institute of Sport Science) 체육과학연구원의 시초다. 이후 1999년에 국민체육진흥공단으로 통합되어 지금의 체육과학연구원이 됐다.
연구원 소속의 스포츠과학·산업연구실에서는 국가대표 선수의 경기력 향상과 종목별 국제경쟁력 강화 그리고 체육 정책 연구 지원까지 담당하고 있다. 총 23명의 스포츠과학 박사가 종목별로 연구와 지원을 하고 있고 16명의 박사가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을 조언하고 있다.
▲ 동작분석 과정을 응용한 프로그램. |
마지막으로 선수의 체력측정을 실시하고 선수 개개인의 건강, 컨디션, 의학적 요인을 점검하고 체력향상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해 준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대회에는 연구원을 현지에 파견해 지원활동을 벌이는데 이번 런던올림픽 스포츠과학 지원팀은 현지에서 선수들의 시차적응 및 컨디션 관리를 도와주고 심리상태까지 진단해 주고 있다. 또한 시합 영상 자료와 종목별 국제 교류 활동 자료를 수집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선수단을 지원하고 있다.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