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극기 휘날리며~ 홍명보팀 멤버들이 일본을 이긴 후 어깨동무를 하고 기뻐하고 있다. 이날 라커룸에선 또 무슨 퍼포먼스가 벌어졌을까. 연합뉴스 |
쉽지 않은 여정이었기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대회 기간 중 수시로 벌어진 각종 해프닝은 선수들을 더욱 뭉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는’ 홍명보팀의 뒷얘기를 묶었다.
# 라커룸은 해방구
선수들은 승리의 감동을 ‘라커룸 퍼포먼스’로 풀었다. 영국 단일팀과의 8강전 승부차기 승리 직후 한국의 라커룸은 난리가 났다. 대회 기간 중 선수들이 휴식 시간마다 즐겨 듣던 싸이의 노래 ‘강남 스타일’을 크게 틀어놓고 ‘말춤’이라 불리는 노래 안무를 따라하며 신나게 춤을 췄다. 춤에 소질이 없는 선수는 ‘막춤’으로 함께했다. 조금 전까지 승리의 감동에 도취돼 서로 껴안고 울던 선수들이었지만, 한번 불이 붙자 멈출 수 없었다. 체력이 완전히 소진돼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춤을 추고 또 췄다. ‘춤바람’이 홍명보팀의 라커룸을 휩쓸고 지나갔다.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이 끝난 직후에는 물과 얼음으로 승리를 만끽했다. 라커룸에 비치된 물과 이온음료, 얼음을 서로에게 뿌려댔다. 이 과정에서 김태영 수석코치가 갑자기 쏟아진 얼음에 맞아 이마가 붓는 불상사도 겪었다. 김 수석코치는 “아프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렇게 기분 좋게 다칠 수 있다면 두 번, 세 번도 좋다”며 활짝 웃었다. 라커룸은 우리 선수들이 느낀 승리의 쾌감을 마음껏 표출한 해방구였다.
#한국팀 식당에서 발냄새가…
런던올림픽 조직위원회는 조별리그 기간 중 같은 조에 속한 나라들의 숙소를 같은 호텔로 배정했다. 뿐만 아니라 엇비슷한 층을 쓰도록 해 곧 경기를 치를 상대팀 선수들끼리 호텔 복도 또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경기를 앞둔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홍명보팀 멤버들은 상대 선수와 만날 때마다 치열한 눈싸움으로 기선을 제압했다.
해프닝은 식사 시간에 발생했다. 홍명보팀이 특별히 대동한 김형채 파주대표팀트레이닝센터 조리장의 손끝에서 마법이 이뤄졌다. 경기 전날 저녁 식사 메뉴가 화제가 됐다. 김 조리장은 스위스와의 조별리그 2차전을 앞두고 입맛을 돋우는 재래식 청국장을 메뉴로 골랐다. 우리 선수단은 대부분 청국장에 밥을 비벼 기분 좋게 비워냈다. 하지만 상대는 달랐다. 청국장 냄새가 호텔 전체에 퍼지자 옆 식당에서 저녁식사 중이던 스위스 선수들이 혼비백산하며 자리를 떴다. 한 스위스팀 관계자는 축구협회 직원들을 찾아와 “무슨 음식을 먹기에 호텔 전체에 이상한 냄새가 나느냐”며 항의했다.
비슷한 해프닝은 영국과의 8강전을 앞두고도 있었다. 저녁 메뉴는 김치찌개였다. 하지만 영국 선수단이 우리와 다른 호텔에 머문 까닭에 대회 조직위원회 직원들이 희생양이 됐다. 차영일 축구협회 미디어 담당관은 “이미 청국장 사건을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는 조직위 직원들이 김치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자 하나같이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지 않더라”며 웃었다.
# ‘동메달 특사’
▲ 기성용과 구자철. 출처=기성용 트위터 |
희생양은 미디어 담당관과 주무였다. 시시각각 걸려오는 취재진의 전화를 피할 길 없는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가 벌금 폭탄을 맞았다. 미디어 담당관은 “벌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대로라면 총액이 내 연봉보다 많아질 것 같다”며 대회 기간 내내 볼멘소리를 했다. 하지만 실제로 벌금을 낸 사람은 없었다. 대한민국 축구역사상 첫 올림픽 메달 획득을 기념해 홍명보 감독이 모두 사면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특사’ 부러울 것 없었다.
# “우린 북한 몰라요”
런던올림픽 대회 초반에 북한 여자축구대표팀 선수 소개 화면 배경으로 태극기 그래픽이 사용되는 해프닝이 발생한 이후 외신 기자들이 홍명보 감독에게 몰려와 관련 질문을 쏟아냈다.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기성용, 구자철 등에게도 같은 질문이 집중됐다. 홍 감독과 선수들이 “나는 북한대표팀 사건을 잘 모른다. 우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질문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 선수단은 북한 대표팀 관련 이슈가 잠잠해질 때까지 “나는 모른다”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했다.
영국과의 8강전 승리 이후 영국 언론이 “병역 혜택이 한국 선수들에게 자극제 역할을 했다”고 보도한 것을 계기로 외신의 관심은 한국 선수단의 병역 문제로 옮겨갔다. 브라질과의 4강전을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 직후 외신 기자들은 한국 취재진을 찾아와 “한국의 병역 제도에 대해 설명해달라” “병역 특혜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만 집중된 이유가 뭔가” “박지성은 올림픽 메달이 없는데 왜 군대에 가지 않았나” 등 질문 보따리를 풀어냈다. 한국 기자들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은 그들은 “특이하면서도 슬픈 제도다.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차영일 미디어 담당관은 “공식 기자회견이 열릴 때마다 한반도 관련, 병역 관련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면서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자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했지만, 외국에서는 여전히 ‘휴전 중인 분단국가’에 더욱 주목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두 얼굴의 ‘주영 씨’
홍명보팀의 이슈 메이커는 단연 박주영(27·아스널)이었다. 앞서 병역 면탈 의혹이 제기돼 논란을 불러일으킨 데다 경기 감각이 크게 떨어져 있어 팀 기여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자신과 관련한 논란을 의식해서인지 박주영은 대회 기간 내내 취재진을 피해 다녔다. 훈련 또는 경기 직후 취재진과 만나는 믹스트존(mixed zone)을 피해 멀리 돌아가기 일쑤였고, 구조상 피할 수 없을 땐 헤드폰을 끼고 볼륨을 높여 취재진의 질문 요청을 차단했다. 경기 중 턱 부위를 다쳐 치료를 받느라 본의 아니게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스위스전 직후에는 “턱이 아파 말하기 어렵다”며 인터뷰 요청을 고사하고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취재진에겐 언제나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인 박주영은, 그러나 동료들과 팬들 앞에서는 태도가 백팔십도 달랐다. 늘 활기차게 후배들을 격려했고, 밝은 농담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박주영의 장기는 성대모사였다. 아이큐 150으로 알려진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주변 인물들의 말과 행동에서 특징적인 요소를 파악한 뒤 그럴 듯하게 흉내 냈다. 선수단과 코칭스태프의 가교 역할을 한 박건하 코치의 말투를 똑같이 따라했고, 이케다 세이고 피지컬 코치가 인상을 쓰며 시계를 쳐다보는 동작을 리얼하게 재현해냈다. 박주영이 훈련장에서 ‘인간 복사기’로 활약할 때마다 선수단 사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훈련장 분위기도 밝았다. 대표팀 관계자는 “동료들과 지낼 땐 누구보다 밝고 활기찬 (박)주영이가 취재진 앞에만 서면 표정이 굳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아쉬워했다.
송지훈 일간스포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