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독재 시절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의 검시가 37년 만에 이루어지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
37년 만에 이뤄진 고 장준하 선생의 검시는 지난 1일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가족들이 파주시의 공동묘지에 안장된 장 선생의 유골을 통일동산 내 ‘장준하공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이번 검시에는 서울대 의대 법의학연구소 이윤성 교수가 참여했는데 두개골에 생긴 상처의 성격을 진단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75년 실족사 당시 이뤄진 검안에서 “오른쪽 귀 뒤 급소가 예리한 물체에 찔린 듯한 함몰된 상처가 사망의 직접적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만큼 이번 검시는 이를 재확인하는 차원에서 이뤄진 셈이다.
▲ 생전의 장 선생과 골절된 두개골 사진. |
현재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은 “인위적인 가격을 당한 것임에 틀림없다”며 정부의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나선 상태다. 하지만 유족들의 ‘타살’ 주장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여러 가지 난제가 있다. 일단 검시를 했던 이윤성 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사인에 대해 ‘둔체에 의해 손상됐다’라고 밝혔지만 “가격에 의한 것인지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혀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라고 밝혀 여전히 사인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국정원진실위원회에 참여했던 법무관 출신 강 아무개 씨도 “1차 검시만으로 타살을 의심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특히 이번 검시는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에 그쳤다고 하던데 육안으로 그런 것(추락에 의한 것인지 둔기로 맞은 것인지)까지 가려내기는 어렵다”라고 밝혔다.
▲ 2007년 장준하 선생의 미망인이 살고 있는 집을 방문한 박근혜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
그러나 이번 검시가 전면 재조사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사건 자체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을 뿐 아니라 타살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의 강 씨는 “해당 사건은 2~3차례에 걸쳐 충분한 조사가 이뤄진 뒤 발표된 것으로 결과를 뒤집기는 힘들 것 같다. 유족들이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지만 지금 시점에서 갑작스럽게 대대적인 보도가 이뤄지는 것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라고 덧붙였다.
장 선생의 의문사는 이미 지난 2000년 발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진상규명 불능’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에 앞서 민주당에서는 1993년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조사위원회’(한광옥 위원장)를 꾸려 자체 조사를 벌였지만 뚜렷한 소득을 올리지 못했다. 당시 조사위원이었던 한 인사는 “몇몇 사건들이 아쉬움 속에서 조사가 매듭지어진 것은 사실”이라며 “장준하 선생 사건 역시 다시금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라고 말했지만 장준하 선생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다.
장 선생의 실족사 당시 유일한 목격자였던 김 아무개 씨(사건 당시 41세)는 의문사진상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30여 차례 출두하며 타살 의혹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김 씨는 장 선생이 제9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자원 봉사자로 처음 인연을 맺었고 그 이후 몇 년간 교류가 없다가 사건 당일 장 선생과 함께 등산길을 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장 선생이 실족사 당한 이후 경찰이 아닌 군부대에 연락을 취하는 등의 조치로 의구심을 키웠다. 하지만 진상규명위원회는 ‘김 씨의 진술은 13년 전인 사건 때와 똑같았다’고 발표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유일한 목격자였던 김 씨의 증언이 바뀌지 않는 이상 재조사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든에 가까운 그가 재조사에 응할 가능성은 낮다. 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쳤던 김 씨는 의문사진상위 조사 시점에 한 보수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추락사가 분명한데 더 이상 무엇을 말하란 말인가. 내가 장 선생님을 잘 모시지 못해 그런 일까지 벌어져 죄책감으로 살고 있는데 타살 의혹으로 십수년 동안 손가락질을 받아 왔다”며 울분을 토로한 바 있다. 또 당시 조사를 맡았던 한 법무관은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존재했고 사건 현장에서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다”며 “조사 과정에서 목격자인 김 씨의 타살 여부에 관해서도 다각도로 추궁했지만 아무런 단서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검시가 대선을 4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이뤄지면서 정치 공세로 이어지고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민주통합당에서는 검시 이후 언론에 장 선생의 두개골이 공개되자 즉각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렸다. 하지만 이미 지난 93년 장준하 사건이 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이슈화됐을 때 비슷한 위원회를 꾸린 ‘전례’가 있는 만큼 그 실효성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은 상황이다.
민주당의 한 당직자는 “유족들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는 일도 무척 중요하지만 이를 넘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 같다. 또 이번 일을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책임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역효과일 수도 있는데 앞서 나가는 느낌이다”라고 전했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 역시 “유가족들을 위해서라도 죽음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민주당의 대선 쟁점화는 별로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사망 의혹 보도 기자들 ‘철창행’
장 선생이 실족사한 곳은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으로 489m의 낮은 봉우리였지만 추락 지점은 경사 75도, 높이 14.7m의 가파른 암벽이었다. 자일과 같은 장비 없이는 내려가기 힘들어 보통 우회해서 하산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장 선생이 하산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첫 번째 의문이 발생한다.
그런가 하면 체중이 73kg 정도였던 장 선생이 15m 높이에서 떨어졌음에도 전신 골절상이 나타나지 않고 휴대한 커피 보온병과 안경이 깨지지 않아 의구심을 더했다. 이는 장 선생이 추락 과정에서 암벽 중간 지점의 소나무를 잡았지만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함께 추락한 흔적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또 장 선생이 추락한 시간을 재구성해 보면 사고 시점에 사고지점까지 도달하기 힘들다는 점, 실족사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김 씨와 장 선생의 관계가 불분명한 점 등을 들며 의혹은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초 검찰 조사에서는 추락에 의한 실족사, 이후 의문사진상위에서는 ‘조사 불능’으로 각각 결론이 났다. 사건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장준하 선생의 죽음에 대한 의혹들을 기사화하기도 했지만 유신 정권 하의 긴급조치 9호(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의 조치)로 해당 기자들은 구속됐다가 석방되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