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영기 기자 yk000@ilyo.co.kr |
지난 8월 16일, 기자는 경남 통영에서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강기훈 씨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그 날은 때마침 강 씨가 간암 치료주사를 맞으러 경남 마산의 한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최근 투병생활에 지쳐서 인지, 그의 안색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건강을 추스르기 위해 이곳 한적한 남해에서 요양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조심스레 현재 자신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 B형 간염을 앓아왔다. 지난해 한 번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서부터 징후가 보였다. 올해 4월 정밀 검사를 통해 간암판정을 받았다. 5월께, 수술을 받고 재발방지에 신경 쓰고 있다. 만약 암이 재발한다면 이제는 수술도 불가능하다. 지금은 아는 지인의 집을 빌려 요양 중이다. 지금 와서 말하지만 처음 간암 판정을 받았을 때는 정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왜 안 그러겠나. 그의 말대로 ‘간암 판정’은 날벼락과 다름없었다. 지난 1991년 사건 당시, 3년간 억울한 투옥생활을 견딘 그는 지금까지 투쟁 중이다. 그 기나긴 투쟁에 지쳐 갈 즈음, 무서운 병마까지 얻은 것이다. 지독히도 운이 없는 사나이였다.
“1994년 출소 뒤 내 인생은 그 자체가 투쟁이었다. 세상에 나와 가정도 이루고 본업에도 종사했지만 쉽사리 잊기 힘들었다. 당시 사건은 시간이 흘러도 끊임없이 이슈화됐다. 그 기억을 더듬는 과정에서 극도의 정신적 후유증이 엄습하곤 했다.”
세상에 나와 15년간 프로그래머로 활동했다는 강 씨는 당시 사건의 후유증으로 상당기간 정신적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5년 전부터는 본업마저 접어야 했다.
재심을 청구한 강 씨 측 변호인단은 이후에도 검찰과의 문서 공방전을 이어갔다. 지루한 투쟁 끝에 결국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009년 9월, 당시 판결을 뒤엎고 재심할 것을 결정했다. 검찰은 곧바로 항고했다.
“물론 재심 결정까지 간 것 자체가 사법부로서는 전향적인 결정이었다. 한 번 판결난 사건이 뒤집어지는 일은 정말 쉬운 게 아니다. 당시 사건의 민감한 부분까지 다 들춰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대법원은 움직이지 않았다. 3년 넘게 미뤄질 줄은 정말 몰랐다.”
2009년, 재심 결정이 난 후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법부는 지금까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21년째 투쟁을 이어온 강 씨의 속은 타들어만 가고 있다. 인맥과 학연으로 이어진 사법부의 강력한 카르텔은 그에게 있어서 너무나 높았다. 그는 사법부의 안일한 행태와 관습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건 사법부의 월권행위이고 직무유기다. 자기 발등을 찍는 꼴이다. 자기 판결에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20년 전 재판 담당자들이 여전히 사회 지도층에 남아 있다. 당시 담당자들이 지금도 변호사로 활동하거나 대학 총장까지 역임하고 있다. 그들의 말 몇 마디와 입김이면 그들의 후배들로 채워진 현재의 사법부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강 씨 측 공동변호인단 이석태 변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물론 사건 자체가 비교적 근접한 시점에 발생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신중한 태도는 이해가 간다. 하지만 재심이 3년 동안 늦어지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최근까지 우리 변호인단이 탄원서까지 제출하며 재심을 요청하고 있지만 그들은 묵묵부답이다. 피고는 당연히 조속한 공판 재개를 통해 법정에 설 권리가 있다”며 현재 사법부의 행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오랜 투쟁과 최근 얻은 병마 때문일까. 강 씨는 지금 녹다운 직전이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당당히 목소리를 드높였던 그는 이제 투쟁심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그에게 ‘사건이 해결되면 어떨 것 같느냐’라고 묻자 그에게서 돌아 온 대답은 무척 퉁명스러우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었다.
“해결? 도대체 해결이 뭔데. 이미 지나간 일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해 볼까. 막상 재판이 시작되고 내가 법정에 서서 지난 과거 기억을 더듬는 것 자체가 끔찍하다. 또 무죄가 확정돼도 별로 기쁠 것 같지 않다. 지난 21년 동안의 내 인생을 보상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사법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투병 생활을 마치고 나 때문에 고생만 해온 내 아내와 아들, 딸과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뿐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1991년 6월 유서대필사건으로 구속되고 있는 강기훈 씨. 사진제공=시사저널 |
“유서 써주며 분신 종용했다” 매도
일명 한국판 ‘뒤레피스 사건’으로 일컫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지난 1991년 4월 발생했다. 당시 명지대에 재학 중이던 19세 소년 강경대는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를 맞고 사망했다. 당시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는 스스로 유서를 작성하고 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정원과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에게 김 씨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사건을 날조했다. 결국 이듬해 재판에서 강 씨는 징역형을 선고받고 3년 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2005년 독립기관으로 세워진 진실화해위는 당시 사건을 재조사했다. 결국 지난 2007년, 사건이 날조됐다고 결론내고 법원에 재심할 것을 권고했다. 국과수 및 7개 검증기관의 재조사 결과 당시 유서는 김 씨 본인이 작성한 것으로 결론 난 것. 지난 2009년 9월, 서울고등법원은 진실화해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재심 결정(2008재노20)을 내렸고 검찰은 곧바로 항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3년간 사건 재심을 실시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