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후견인 보육원장의 성씨 받아…원장 “후견인 없인 아이 통장도 못 만들어, 불가피한 선택”
#같은 성씨를 가진 23명의 아이들
서울시 관악구 난곡로에는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보호센터)’가 있다. 보호센터는 재단법인 주사랑공동체가 2009년 12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보호센터에는 ‘베이비박스’와 ‘베이비룸’이 있다. 두 공간에는 감지 센서가 있다. 어느 부모가 아이를 이 공간에 놓으면 센터에는 음악이 울린다. 베이비박스에 놓으면 연주곡 ‘엘리제를 위하여’가 퍼지고, 베이비룸에 놓으면 ‘딩동’ 소리가 난다.
보호센터에 맡겨진 아이들의 운명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우선 부모가 다시 아이를 데려가는 경우가 있다. 아이들 중 일부는 입양 절차를 밟는다. 남은 아이는 보육원 등 사회복지시설로 옮겨진다. 주사랑공동체 통계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0년까지 1199명의 아이가 보호센터에 맡겨졌고, 이 중 905명이 시설로 옮겨졌다. 약 75%가 시설로 가는 셈이다.
다른 곳으로 가기 전 보호센터에 맡겨진 아이들은 짧게는 하루, 길게는 6개월까지 머문다. 주사랑공동체를 운영하는 이종락 목사는 “2022년까지만 해도 사회복지시설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엄마가 아이를 데려가거나 입양되는 비중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설에 들어간 아이들 중에선 드물지만, 다시 부모를 만나거나 입양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가정에 들어가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간다. 가정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름과 출생지를 파악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 부모가 쪽지로 남기거나 보호센터 상담을 받은 경우다. 이 아이들은 부모의 성씨를 받는다. 본적에 해당하는 등록기준지는 아이가 발견된 지역으로 정해진다.
성과 이름조차 파악할 수 없는 아이들의 이름은 시설 원장이 지어준다. 성씨는 원장의 것을 받는다. 이 목사는 “보육원 원장이 법적으로 아이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게 된다. 부모의 성씨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원장의 성씨를 따른다”고 말했다.
A 초등학교에 희귀한 성씨의 아이들이 대거 다니게 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보육원 원장의 성씨를 받은 아이들이 모두 같은 초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 중 일부는 이런 점들로 인해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호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A 초등학교 학생들의 심리검사를 진행했던 상담사 B 씨는 이 아이들이 주변의 시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했다.
5월 진행된 A 초등학교 학생 심리검사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보육원 아이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아이들은 상담사에게 학교에 가기 싫다고 표현했다. 다른 학교에 가면 한결 나아질 것 같다고도 했다. 보육원 출신이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이다. B 씨는 “(학교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아이들이 선생님께 성은 불러주지 말고, 이름만 불러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B 씨는 “1~2년 전에도 A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성씨 관련해서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학교에서는 성씨를 바꾸는 등 마땅한 방법이 없고, 보육원 원장도 문제가 없다고 해서 별다른 조치가 나오지는 않았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A 초등학교에 관련 내용 확인을 요청했지만,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보육원 원장 C 씨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성씨를 부여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C 씨는 약 30명의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C 씨는 “생년월일만 써서 맡긴 아이들은 돌봐줄 후견인이 없다. 후견인이 없으면 아이는 어떠한 활동도 할 수 없다. 통장도 못 만든다”며 “일단 이름 없이 들어오는 아이들에게 원장의 성을 따서 이름을 짓고, 원장이 법적으로 후견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도 보육원 출신이라고 밝힌 C 씨는 40년 넘게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봤다고 말했다. C 씨의 설명에 따르면 보육원은 아이들에게 학원비와 대학 학비까지 지원한다.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 일정에 따라 자유롭게 생활한다. 태권도와 축구 등 운동을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C 씨는 “그래도 보육원에 기부를 해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C 씨는 자신의 성씨를 받은 아이들이 별다른 불만을 드러낸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은 (나를) 아빠라고 부르며 따른다. 성씨에 대해 불만이나 고충을 들은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베이비박스에서 이름 없이 보육원으로 오는 아이들은 관할 구청에서 성씨를 지어준다. 원장이 임의대로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낙인효과 없도록 제도 정비 필요
C 씨의 말처럼 베이비박스에 맡겨진 아이들은 시설로 보내지기 전 국가에서 성씨를 정해준다. 베이비박스 아이들은 지자체장의 성씨를 받는다. 이름은 주사랑공동체 직원이나 시설 원장이 지어준다. 관악구청 관계자는 “이러한 절차는 권고사항”이라며 “최근 몇 년 동안은 성씨가 없는 아이가 발견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B 씨는 구청의 성씨 부여 절차를 의무화하고, 더 다양한 성씨를 부여하도록 제도적인 정비가 필요하다고 했다. B 씨는 “보육원 출신 청년들을 상담했다. 이들은 같은 시설 아이들을 절대 안 만난다고 했다”며 “성씨가 같다는 것 때문에 학교에서 보육원 아이라고 낙인 찍히는 등 안 좋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B 씨는 앞으로도 베이비박스 출신 아이들이 이 청년들과 유사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종락 목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성씨를 결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이 목사는 “어렸을 때는 (성씨를 결정할 때) 의사 표현을 할 수 없어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며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사춘기 때 자신의 성씨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자기가 성씨를 스스로 정할 수 있도록 법 제도를 만드는 것도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이가 성인이 된 다음 부모를 찾고, 원래 성씨를 알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 교수는 “뿌리를 찾는 일은 중요하다. 누구나 부모를 알고 싶어한다”며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보육원 출신 사람들인 ‘그림자 아이들’이 부모를 찾기 위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노 교수는 “아이들이 부모를 찾으려면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개인정보보호와 당사자의 동의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너무 많다”며 “국가가 나서서 부모와 아이를 연결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강원 기자 2000won@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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