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24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남부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는 여의도 칼부림 사건의 피의자 김 씨(왼쪽)와 현장검증 중인 광진구 다세대주택 성폭행 피의자 서 씨. 연합뉴스 |
지난 8월 23일 오후 퇴근길. 여대생 세 명이 서울시청 인근의 대한문 앞에서 근심어린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최근 벌어진 묻지마 범죄가 그들 대화의 화두였다. 먼저 얘기를 꺼낸 한 여대생은 “우리도 저 서소문 골목을 지나가다 혹시 칼 맞는 거 아냐. 저 곳은 술 취한 노숙자 아저씨들 자주 앉아 있잖아. 세상이 너무 무섭다”라고 말했다. 반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다른 여대생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같은 날, 출장 때문에 지방을 찾은 직장인 이 아무개 씨(여·46)도 ‘묻지마 범죄’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이 씨는 일행과 잠시 떨어져 혼자 있게 됐다. 그런데 갑자기 노숙자 한 명이 “500원만 달라”고 요구하며 이 씨에게 다가왔다. 평소에도 종종 발생하는 상황이라 무시하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불현듯 묻지마 범죄 사건들이 떠올랐다. 결국 이 씨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 노숙자에게 1000원을 건네곤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직장인 송 아무개 씨(여·24)는 최근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 직장 동료와 트러블을 겪었다거나 일 자체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집과 보다 가까운 회사로 옮기고 싶다는 것이 이직을 계획하는 이유다.
송 씨는 “출퇴근 시간만 2시간이 넘는다. 입사 때만 하더라도 이 부분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잇따라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 때문에 지하철 타는 것조차 두렵다. 사실 지하철에서 발생한 폭행사건을 몇 차례 목격하기도 했고 성추행을 당한 적도 있다. 이제는 지하철만 타도 온 신경이 곤두서 회사에 도착하면 아무런 힘이 남아있지 않아 진지하게 이직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요즘 우리 사회에서 ‘묻지마 범죄’에 대한 공포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8월 18일 의정부역 칼부림 사건을 시작으로 8월 22일 여의도 칼부림 사건까지 5일 동안 연이어 관련 사건이 발생하면서 시민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다.
‘묻지마 범죄’의 공포감이 다른 범죄와 비교해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예상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묻지마 범죄’의 가해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타깃으로 한다.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기자와 통화한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최근 ‘묻지마 범죄’ 공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이은 묻지마 범죄로 인해 개인의 불안이 증폭·확산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도 공포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이러한 공포감 때문에 스스로 자구책을 강구하는 사람들까지 있지 않나. 결국 사람들이 이러한 공포감 속에서 사회안전망을 전혀 믿지 못하고 있는 지경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진단했다.
한국범죄심리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상균 백석대 교수는 현대사회의 특성을 들어 공포감 확산 현상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시민들로서는 최근 잇따른 범죄 탓에 당연히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사회는 정보와 기사가 신속하게 유통되는 세상이다. 언론의 경우 일련의 사건보도를 통해 범죄예방이라는 순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도리어 사람들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특히 최근 들어 언론의 범죄보도 행태가 선정적인 측면만 부각시킨 면이 없지 않다. 이 점은 생각해 봄직하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묻지마 범죄’가 양산되고 있는 원인에 대한 해석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예전 농경사회는 ‘관계’ 중심적인 사회였다. 하지만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인간 소외현상이 부각되고 있다. 특히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노미현상을 겪게 된다. ‘묻지마 범죄’는 결국 이처럼 소외된 자들이 사회 전체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황 교수 역시 이에 대해 “묻지마 범죄는 또 다른 사회적 현상인 자살과 맥을 같이한다. 묻지마 범죄 역시 자살처럼 삶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해 오는 상실감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심리상태가 지속되면 공격적인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최근에는 이것이 남에게 향하면서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라며 나름의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묻지마 범죄’의 공포감으로 인해 사회에 나타날 수 있는 추가적인 후유증과 부작용도 무시하지 못한다. 김 교수는 이에 대해 “결국 묻지마 범죄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 될수록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사라질 수 있다. 범죄심리학에 ‘깨진 창 이론’이라는 게 있다. 두 대의 차가 있다고 치자. 한 대는 유리창이 깨진 차고 하나는 멀쩡한 차다. 사람들은 결국 멀쩡한 차가 아닌 유리창이 깨진 차로 다가가 바퀴도 빼가고 의자도 빼 갈 것이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두면 결국 문제가 확산된다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묻지마 범죄의 확산 자체가 결국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문제는 경찰 혼자 해결할 수 없다. 범죄 예방을 위한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경찰과 같은 사법기관은 물론 일종의 T/F팀을 구성해서라도 복지부나 교육부 같은 관련 부서의 다각적 참여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흉악범죄 예방을 위한 국가적 프로젝트가 이미 시행 중이다”라며 전국가적 해결책의 마련에 대해 강조하기도 했다.
한 범죄심리학자는 ‘묻지마 범죄’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됐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묻지마 범죄’ 현상의 근본에는 소외계층에 대한 무관심과 배려부족이라는 분명한 사회적 원인이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 이유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묻지마’라는 말 자체가 잘못됐다는 설명이다. 이 역시 결국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감을 줄이고 그들을 돌볼 수 있는 현실적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주장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가적 차원의 대책마련은 요원해 보인다. 지난 8월 23일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은 공식회의 석상에서 “묻지마 범죄는 야당에 큰 책임 있다”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여야 싸움을 부추겼다. 정치권은 이번 일련의 사태 속에서 대책마련 강구는커녕 서로 막말논란에 대한 책임만 떠넘기며 범죄의 공포에 떨고 있는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과연 집밖을 나서기가 무서운 요즘 가까운 미래에 전국가적 범죄예방 시스템이 마련돼 국민들의 공포감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의정부 지하철 칼부림 사건>
▶범행날짜: 8월 18일 오후 6시 35분경 ▶범행장소: 서울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 승장강과 전동차 안 ▶범행내용: 30대 남성이 승강장과 전동차 안에서 공업용 커터칼로 휘둘러 ▶피해사항: 8명 중경상 ▶범행동기: 침을 뱉었다는 이유로 사소한 말다툼 벌이다 흉기 휘둘러 ▶특이사항: 빈곤층, 은둔형 외톨이
<부산 초등생 묻지마 폭행 사건>
▶범행날짜: 8월 20일 오후 1시 24분경 ▶범행장소: 부산 강서구 한 초등학교 인근 ▶범행내용: 40대 여성이 하교 중인 초등생 남녀에게 공구 휘둘러 ▶피해사항: 초등생 2명 각각 전치 2주 ▶범행동기: 동기 없음▶특이사항: 피의자 정신질환 앓고 있으며 노숙자
<전자발찌 차고 성폭행·살인벌인 사건>
▶범행날짜: 8월 20일 오전 9시 30분경 ▶범행장소: 서울 광진구 중곡동 주택가 ▶범행내용: 전자발찌 찬 40대 남성이 가정집에 침입, 30대 여성 성폭행하려다 살해 ▶피해사항: 30대 여성 피해자 사망 ▶범행동기: 뚜렷한 동기 없음 ▶특이사항: 피의자 성범죄 전과자로 출소 이후 고립된 생활, 전자발찌 착용한 상태로 범죄
<수원 흉기 난동 사건>
▶범행날짜: 8월 21일 새벽 1시경 ▶범행장소: 경기도 수원 술집과 인근 가정집 ▶범행내용: 술집 여주인 성폭행하려다 가게 들어온 손님에게까지 칼로 찌른 뒤, 인근 가정집에 숨어들어가 일가족에게 또 흉기 휘둘러 ▶피해사항: 1명 사망, 4명 부상 ▶범행동기: 술값 시비 ▶특이사항: 피의자 두 차례 성범죄 전과자
<울산 슈퍼마켓 흉기난동 사건>
▶범행날짜: 8월 21일 오후 9시 20분경 ▶범행장소: 울산 중구 복산동의 한 슈퍼마켓 ▶범행내용: 20대 남성 단골이던 슈퍼마켓 방문해 여사장에게 칼 휘둘러 ▶피해사항: 1명 중상 ▶범행동기: 동기 없음 ▶특이사항: 피의자 은둔형 외톨이
<여의도 칼부림 사건>
▶범행날짜: 8월 22일 오후 7시 15분경 ▶범행장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길 ▶범행내용: 30대 남성 흉기로 전 직장동료 찌르고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흉기 휘둘러 ▶피해사항: 4명 중경상 ▶범행동기: 자신을 험담했던 전 직장동료에 대한 복수 ▶특이사항: 피의자 극빈곤층, 무직
기자가 목격한 ‘여의도 칼부림 사건’그 많던 경찰들 다 어디 갔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국회 앞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인파들은 김 씨를 피해 주변 가게로 황급히 뛰어들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로로 달려갔다. 김 씨는 칼을 든 채 렉싱턴 호텔 맞은편에 있는 한 빵집에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에 있던 시민들은 문 앞에 장애물 등을 설치해 이를 막았고, 일부는 기물들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자 김 씨는 피를 흘리며 누워있던 여성에게 다가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이어 김 씨는 렉싱턴 호텔 앞에서 전화기를 들고 있는 또 다른 여성에게 달려갔다. 112에 신고를 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 여성은 황급히 달아났고, 김 씨는 근처에 있던 행인 두 명을 잇달아 칼로 찔렀다. 불과 10여 분 만에 김 씨는 여의도 대로를 오가며 남녀 시민 네 명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 결국 김 씨는 출동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자해 소동을 벌였다.
이처럼 끔찍했던 현장에서 그나마 빛이 났던 것은 많은 시민들이 김 씨를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장면이다. 한 중년 남성은 뛰어가던 김 씨를 향해 발로 넘어뜨리기까지 했다. 또 경찰이 출동하기 전 이성을 잃은 김 씨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 것도 길을 가던 몇몇 시민들이었다. 기자가 밥을 먹고 있던 식당 안에서도 신고를 위해 112에 전화를 거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반면 경찰이 조금만 더 일찍 출동했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도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은 남는다. 사실 이 주변은 평소 경찰 인력이 상주해 있는 곳이다. 주요 정당 당사가 있기 때문. 또 사건이 벌어진 렉싱턴 호텔 맞은편엔 새누리당 대선후보인 박근혜 전 위원장의 캠프가 있어 경호 인력도 적지 않았다.
김 씨는 검거 후 경찰 조사에서 “회사 합병 과정에서 내가 잘렸다. 자살을 생각했지만 혼자 죽기는 억울해 나를 음해하고 괴롭혔던 두 사람을 해치려 했다”고 진술했다. 김 씨가 처음 흉기를 휘둘렀던 피해자들은 모두 김 씨가 다녔던 한 신용평가사 직원인 것으로 전해졌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