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 위해 헌신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는 배영수의 말에서 가족 사랑이 절로 묻어나왔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2009년 내 성적이 1승12패였다. 일부러 그런 성적을 내려고 발버둥 쳐도 나오기 어려운 숫자들이다. 계약 문제로 인해 훈련을 일찍 시작하지 못했던 것이 시즌 내내 발목을 잡았고 이상하게 그 해에는 내가 등판하면 야수들이 실책을 하거나 불방망이가 물방망이로 전락하는 등 희한한 일들이 자주 발생했다. 야구장 나가기가 싫었다. 공을 던지면 128에서 130km 정도의 속도가 찍혔다. 쪽 팔리고 부끄러워서 감독님 얼굴 보기도 창피했다. 누나한테 야구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네가 편한 대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삼성트레이닝센터(STC)로 들어갔다. 운동하러 간 게 아니라 무조건 야구장을 피해 있고 싶었고 명분상 그곳을 향했던 건데, 그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경기도 죽전에 위치한 삼성트레이닝센터는 삼성 스포츠단 소속 선수들의 재활 트레이닝센터다. 배영수는 그곳에서 레슬링 선수들의 훈련 모습을 보고선 왜 그들이 ‘지옥 훈련’을 운운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야구 선수들의 훈련은 그들에 비해 ‘힘들다’는 말도 꺼내면 안 될 정도라고 생각했다는 것. 한 달 정도를 STC에서 보내고 다시 경산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배영수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경산에 내려가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려다보니 또 다시 야구가 싫어지더라. 그래서 미국 시카고 컵스에 있는 성민규 코치한테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거기서 야구를 하려 했던 게 아니라 무조건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그런 전화를 했는데 다시 돌이켜봐도 그때 그 순간들이 모두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배영수는 팔꿈치 수술을 전후로 ‘혹사’ 논란 속에 있었다. 2006년 한국시리즈 삼성의 우승과 배영수의 팔을 맞바꾼 셈이라는 팬들의 지적도 거셌다. 그러나 배영수는 다시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어느 선수나 혹사 논란은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택했고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타석에 서고 마운드에 오른다. 당시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못할 정도로 팔꿈치가 부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야구하면서 큰 부상을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즌 마치고 수술하면 금세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수술 시기가 늦춰지면서 모든 게 꼬인 것 같다. 그리고 수술하고 좀 더 몸 상태를 잘 만든 다음에 복귀했어야 했는데 조급한 마음에 바로 다음 시즌을 준비하다보니 더더욱 힘든 상황이 되었다. 당시 내가 무리해서 마운드에 오른 데 대해선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 야구보다 더 어려운 건 ‘재활’
야구를 그만두려고까지 마음 먹었던 배영수였다. 미국으로 ‘도망’가려 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배영수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야구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그래서 미친듯이 재활 훈련에 매달렸다. 주위에서 추천한 재활 운동은 단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체험해봤다고 한다.
“별의별 훈련을 다해봤다. 골프공, 핸드볼 공으로도 던지기 연습을 했었고 딱지치기를 하면서 손목의 스냅 훈련을 대신했다. 심지어 방에서 알몸으로 공을 던지는 시늉도 해봤다. 남들이 보면 미친 놈이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선 그런 모든 행위들이 절박함과 맞닿아 있다. 재기에 대한 몸부림, 절박함 때문에 창피한 줄 몰랐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내 구위가 좋아지기만 한다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배영수는 2010년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해에도 좋아지는 걸 느꼈고 플레이오프에서는 확실히 ‘뭔가’를 찾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단다.
▲ 삼성이 6월 12일 한화를 9 대 3으로 이긴 뒤, 7이닝 무실점을 한 배영수와 스리런 홈런을 친 최형우가 이승엽의 축하를 받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2010년 시즌이 끝난 뒤 배영수는 일본 진출을 도모한다. 실제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2년간 연봉 3000만 엔에 합의, 계약금과 인센티브를 포함해 최대 1억 7000만 엔, 당시 환율로 23억 원에 해당하는 몸값을 받아냈다.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배영수는 엉뚱한 곳에서 예기치 않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바로 메디컬테스트였다. 야쿠르트 구단에서 배영수의 메디컬테스트를 확인한 결과 간수치가 높아 계약을 보류하겠다고 통보했던 것이다. 배영수는 B형간염 보균자였지만 그동안 선수 생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말 황당했다. 차라리 팔꿈치나 어깨가 안 좋다고 그랬으면 쉽게 받아들였을 텐데 뜬금없이 간수치를 얘기하니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싶었다. 만약 간수치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한국에선 선수 생활을 어떻게 했겠나. 많이 불쾌했고 이해가 안 됐다. 13년 동안 운동하면서도 별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입단을 앞두고 간수치를 들이대니 어이없었다. 한국에서 다시 검사를 했는데 간수치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나랑 일본과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하고 받아들이려 했다.”
# 꿈의 200승?
한화 송진우 코치가 2006년 200승을 달성했을 때, 자신의 뒤를 이어 그 기록을 달성할 수 있는 선수로 배영수를 지목한 적이 있었다. 배영수는 여전히 200승 달성이 ‘가능하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한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일본 돗토리에서 재활훈련을 할 때 일본 주니치의 베테랑 투수인 야마모토 마사히로를 만나 많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야마모토는 48세의 투수로 통산 212승을 거둔 최고령 출전 신기록을 세운 선수다. 그가 나에게 지금까지 몇 승을 기록했느냐고 묻기에 90승이라고 했더니 몸 관리만 잘 하면 충분히 200승을 할 수 있으니 꾸준하게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해줬다. 1승, 2승씩 꾸준히 승수를 쌓다보면 200승이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그 말이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배영수는 200승을 향해 가는데 걸림돌로 ‘스피드건’이라는 의외의 대답을 내놓는다.
“스피드를 의식하면 천천히 몸을 만들던 선수도 자꾸 의식적으로, 욕심을 내서 구위를 끌어 올리게 된다. 148km가 찍힌 걸 확인하게 된 선수는 조금 더 무리해서 150을 찍으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재활할 때는 스피드건을 보지 않아야 한다. 나 또한 150km를 찍겠다는 욕심에 무리한 투구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30대 이후의 선수들한테는 ‘반짝’보다는 ‘꾸준함’이 생명이란 야마모토의 조언을 잊지 않고 있다.”
▲ 배영수가 메디슨 볼을 이용해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배영수는 2010년 12월 미스코리아 출신 박성희 씨와 결혼, 지난 3월에서야 ‘은채 아빠’가 됐다. 인터뷰 도중에 딸 은채 얘기가 나오자 배영수의 얼굴이 절로 스마일이 된다. ‘은채’란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영락없는 ‘딸 바보’였다.
“만약 내 인생에 가족이 없었다면, 아내와 딸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삭막하고 무의미한 삶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내는 나의 ‘구원투수’나 다름없다. 운동선수의 아내란 자리가 결코 만만치 않을 텐데 내색 않고 날 위해 헌신하는 아내와 사랑스런 딸을 보고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야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 시즌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올해 날 일으켜 세운 건 바로 가족의 힘이다.”
올 시즌이 끝나면 배영수는 다시 FA 신분이 된다. 그는 여전히 해외 진출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 일본, 도미니카든 어디를 가도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야구는 자신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삼성에 잔류한다고 해도 그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자세다. 이미 배영수는 쓰리고 아픈 경험을 통해 인생의 지혜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법도, 또 때로는 여유있게 풀어나가는 법도 알게 된 서른두 살의 베테랑 투수가 앞에 있었다.
대구=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