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민주통합당(민주당)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 광주·전남 지역 순회경선이 열리고 있던 지난 6일 오후 광주 염주종합체육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측이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후 3시로 예정된 본 행사 개막을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이 술렁였다. “대선 출마 선언이냐”는 반응에서부터 “무슨 출마 선언을 긴급 기자회견 형식으로 하겠느냐”는 반응까지 다양하게 쏟아졌다.
잠시 후 안 원장의 측근인 금태섭 변호사가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측 공보위원으로 활동하는 정준길 씨가 최근 전화를 걸어와 협박을 하며 대선 불출마를 종용했다고 폭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선정국을 뒤흔들 대형 이슈임이 분명했다. 현장에 나와 있던 민주당 관계자들, 각 대선후보 캠프 관계자들의 입에서 “또 안철수야?” 하는 탄식과 “왜 하필 이 시기에…”라는 아쉬움 섞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민주당이 중대 고비를 맞을 때마다 돌발적인 행보로 국민들의 시선을 흐트러뜨리곤 했던 안철수 원장이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의 향배를 좌우하는 광주·전남 경선마저 집어삼키고 말았다는 답답함의 토로였다. 여기엔 물론 대선 판도가 ‘안철수 대 박근혜(새누리당 대선후보)’의 대결구도로 짜이면서 민주당과 민주당 대선주자들은 중심에서 밀려난 채 곁불이나 쬐게 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반영됐다.
어쨌든 안 원장 측의 기자회견 소식은 대형 폭탄임에 분명했다. 그것도 민주당이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는 대형 사건이었다. 이날 광주·전남 경선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각 후보 경선 캠프는 안 원장 측이 제기한 정치사찰, 정치공작 의혹에 대한 논평을 쏟아냈다. 이날 경선 결과에 따라 결선투표가 성사될지, 성사된다면 누가 결선투표에 올라갈지 등이 분명해질 공산이 컸지만, 각 후보들도 집안일에만 신경 쓰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분주한 움직임은 7일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민주당은 오전 최고위원회의와 확대간부회의를 잇달아 열고 안 원장 측 의혹 제기와 관련,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 사정당국 등을 향해 무차별적 공세를 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안철수 원장에 대한 불출마 협박은 우리 민주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유신의 망령, 전두환 독재정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어떠한 경우에도 민주 국가에서 벌어져선 안 되는 일이기에 국회 내에서 관심을 갖고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박근혜 후보가 정준길 씨에 대해 ‘그럴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데, 그렇다면 ‘그럴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며 “국회에서 모든 의혹의 실체를 투명하게 밝히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결국 이날 회의에서 우윤근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새누리당 정치공작을 위한 이명박 정권 불법사찰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민주당이 이처럼 발 빠르게 대처한 데에는 이번 사안의 엄중함이 반영돼 있다. 특히 안 원장 측 의혹 제기의 칼끝이 박근혜 후보를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당으로서도 가만히 팔짱 끼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민주당 내에선 이번 정치사찰, 공작정치 논란이 민주당과 안철수 원장 간의 공조를 공고히 할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 섞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겉보기엔 ‘안철수 대 박근혜’의 싸움처럼 보이지만 잘만 활용하면 ‘범야권 대 박근혜’의 구도로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한창인 와중에 당 선거관리위원회의 일원인 송호창 의원이 금 변호사의 기자회견에 배석하도록 당 지도부가 허락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 강원지역 경선후보 토론회에 참석한 후보자들. 안철수 협박 논란으로 대선 판도가 ‘안철수 vs 박근혜’로 짜이면서 민주당의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사진제공=손학규 |
‘민-안 공조’가 범야권 후보단일화에 결정적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번 정치사찰, 정치공작 의혹에 대해 민주당과 안 원장이 공동보조를 취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쌓일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이해충돌 때문에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중진의원은 “안 원장이 이번 일을 계기로 정당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안 원장이 개인 대변인을 두고 대응하는 것과 민주당이라는 제1야당이 진상조사위를 꾸리고 국정조사를 추진하고 국회에서 정치사찰 문제를 이슈화하는 것은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르다”며 “안 원장이 그동안 정당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을 가졌다고 해도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을 뒷받침해 줄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소 성급한 전망이기는 하지만 이번 정치사찰, 정치공작 의혹과 그에 따른 ‘민-안 공조’가 결과적으로 안 원장이 민주당에 입당할 수 있는 명분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안 원장은 그동안 특정 진영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기성 정치를 넘어서는 판을 짜겠다는 의지를 비쳐 왔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반 새누리당, 반 박근혜 진영으로 묶이게 된 측면이 있다”며 “이런 상황이라면 안 원장이 굳이 민주당 입당을 마다할 이유도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정치평론가는 “금태섭 변호사가 안 원장의 허락 하에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안 원장이 그동안 정당정치와 거리를 둬 왔지만 대선 출마선언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현 시점에 와서는 ‘무소속으로는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면서 “이번 기자회견이 안 원장의 정당정치 참여를 위한 사전 포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관측은 이번 사태가 민주당에게 별로 나쁠 게 없을 것이라는 낙관론을 깔고 있지만, 이보다는 비관론이 우세한 게 사실이다. 당장 민주당 출입기자들의 반응이 그렇다. 안 원장 측의 기자회견 소식이 전해진 뒤 민주당 기자들 사이에선 “더 이상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쫓아다닐 이유가 사라진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오갔다. 일부에선 “대대적으로 마크맨을 재조정해야 할 것 같다”는 반응도 나왔다. 대선 시기에 출입 기자별로 담당 후보를 정해 전담 마크하도록 해 왔는데, 이제 민주당 대선주자들의 마크맨들을 대거 ‘안철수 마크맨’으로 돌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는 흥행 실패라는 평가를 받아 온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향후 더 국민적 관심에서 멀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깔고 있다.
낙관론자들의 주장처럼 ‘민-안 공조’가 이뤄진다고 해도 그 결과는 ‘안철수 띄우기’로 귀결될 가능성도 높다. 아무리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거들고 나서더라도 근본적인 갈등의 당사자는 안 원장과 박 후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평론가와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안철수 대 박근혜’의 양강 구도가 고착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 것도 이 같은 사정을 반영한다.
민주당 내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3선 의원은 “안 원장이 야권 단일후보가 된다면 우리가 아무리 ‘안철수는 우리 편’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민주당이 대선후보조차 배출하지 못하는 ‘불임정당’이 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며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도 60년 전통의 민주당을 이렇게 초라하게 전락시킨 데 대한 책임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
흥행 실패…잡음만 커지네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줄곧 4위에 그치며 조명을 받지 못해 온 정세균 후보가 지난 6일 광주·전남 순회 경선에서 이처럼 사자후를 토했다.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별칭이 보여주듯 좀처럼 남에게 험한 소리를 하지 않는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모바일 투표를 둘러싼 논란과 잡음이었다. 정 후보는 이해찬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가 연단에 오를 때마다 야유와 고성이 난무하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60년 전통의 민주당이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놓였다. 지금 당의 분란은 당심과 민심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라고 쓴소리를 쏟아냈다.
정 후보는 이번 대선후보 경선에 앞서 룰을 정할 때 유일하게 모바일 투표 도입에 반대했던 후보다. 통합진보당(진보당)이 인터넷 투표에서 발생한 불공정 논란에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며 모바일 투표를 통한 완전국민경선제가 큰 화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었다.
미미한 수준의 여론조사 지지율을 반영하듯 정 후보의 주장은 전혀 먹히지 않았지만, 막상 모바일 투표로 인해 경선이 파행을 거듭하자 그의 경고가 다시 한번 조명받고 있다. 여기에는 모바일 투표를 둘러싼 경선 파행이 대선후보 경선 흥행에 찬물을 끼얹은 데 그치지 않고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도 민주당에게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깔려 있다.
민주당 광주시당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광주·전남 지역 경선 투표율이 50%를 조금 넘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며 “핵심 지지층이 민주당 경선에서 등을 돌렸다는 게 확인됐다”고 진단했다. 이 관계자는 “당 지도부를 포함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바일 투표를 신주단지 모시듯 했지만 남은 건 불공정 논란, 조직동원 논란뿐”이라며 “향후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는 지금과 같은 모바일 투표를 결코 다시 실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의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민주당 인사들이 적지 않다. 비노(비노무현) 성향의 한 중립파 의원은 “경선 과정에서 모바일 투표가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내가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라 해도 이런 모바일 투표는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시간 역시 민주당이 아닌 안 원장 편이라는 점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윤호중 사무총장이 최근 ‘민주당에 입당하지 않는다면 안 원장과의 단일화는 어렵다’고 밝힌 데 대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며 “결국 안 원장이 원하는 시점에, 안 원장이 원하는 방식으로 단일화를 추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