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의 문선명 총재와 그의 부인. 사진제공=통일교 |
# 곤론마루호 대참사까지 피한 파란만장 생존기
문선명 통일교 총재는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음력 1월 6일, 평안도 정주군 평범한 기독교도 여염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작은 눈 탓에 ‘쪼금눈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훗날 세계 10대 단일교단의 교주로 성장하는 이 평범한 아이는 젊은 시절부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학창 시절 오산학교와 공립보통학교, 경성상공실무학교를 거친 문 총재는 현해탄을 건너 와세다대 부속 공업학교에서 수학했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가속화되던 시점에서 그는 졸업 6개월을 앞두고 조기졸업하며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1943년 9월, 그는 끔찍한 역사적 대참사를 맞이한다. 바로 미군의 기습공격에서 비롯된 당시 세계 최대 규모 여객선 ‘곤론마루호 침몰’ 사건이었다. 귀국길에 오른 한국인 유학생 500명이 희생당한 대참사였다. 문 총재 역시 곤론마루호 탑승이 예정된 상황. 하지만 그는 탑승 당일, 탑승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간발의 차이로 배를 놓치고 만다. 문 총재에게는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1948년 2월, 북한에서 남한스파이 혐의로 흥남감옥에서 비료공장 강제노동에 시달린 그는 수감기간 중 한국전쟁의 여파로 사형위기에 처하게 된다. 전쟁이 가중되는 상황 속에서 수감자 관리가 여의치 않자 장기 수감자부터 하나하나 처형을 해나가기 시작한 것. 1950년 10월 13일,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상륙작전으로 밀고 들어온 연합군이 흥남을 점령하고 문 총재의 처형예정일 하루 전, 감옥 문을 열어줬던 것이다.
이외에도 문 총재는 지난 2007년 7월 있었던 헬기 불시착 사고위기까지 무사히 넘겼다. 그는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의 역사적 위기상황과 인생말년 일촉즉발 위기로부터 기적적으로 생존한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였다.
▲ 문 총재 시신이 유리관에 안치된 모습. |
▲ 문 총재의 주례 하에 열린 대규모 국제합동결혼식. 사진제공=세계일보 |
1955년 발생한 이른바 ‘연세대·이화여대사건’은 교단 포교사는 물론 국내 종교사에 있어서도 무척 특별한 사건이었다. 당시 교단이 ‘시대의 지성’이 몰려 있는 캠퍼스가에 전략적인 포교활동을 시도하면서 일이 커진 것이다.
당시 기독교 재단의 학교인 연세대와 이화여대를 중심으로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당황한 이대에서는 특사까지 급파했지만 투입된 특사까지 통일교도로 전향하는 지경까지 갔던 것. 결국 당시 연세대와 이화여대 측은 통일교도로 전향한 학생과 교직원 20명을 강제로 퇴학·퇴직 조치했다. 당시 이 사건은 ‘사이비 논쟁’과 ‘종교의 자유’라는 상대적 가치관 속에서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사건의 여파로 문 총재는 3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무죄로 석방된다. 사건 이외에도 문 총재는 이단시비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수차례에 걸쳐 옥살이를 한다.
# 고르바초프 단독 면담
문 총재가 남긴 국제적 발자취를 돌이켜보면 국가원수 이상의 행보를 보여 왔다 할 수 있다. 특히 1990년 4월 당시 소련 공산당 총서기였던 고르바초프와의 단독 면담은 국내 정치사적으로도 의미 있던 사건이었다. 당시는 한-소 수교 이전으로 노태우 대통령도 회담을 갖기 전이었다.
문 총재는 당시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세계언론인대회 참석차 소련을 방문했다. 고르바초프는 대통령궁으로 문 총재를 초청했다. 반공주의자였던 문 총재는 밀실면담을 통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지지와 한-소 수교 및 정상회담을 종용했다. 당시 문 총재가 친분의 표시로 헤어지면서 고르바초프 손목에 자신의 시계를 채워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훗날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불고기를 대접하는 등 해후를 나누기도 했다.
문 총재가 걸프전과 9·11테러 등 오랜 기간 미-중동 간 분쟁 속에서 밀사역할을 했던 것도 유명하다. 특히 문 총재는 미국 대통령은 물론 팔레스타인 최고지도자였던 아라파트와도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무장경비로 삼엄한 아라파트의 집무실에 들어가 독대한 몇 안 되는 민간인이기도 했다.
1970년대 미국 포교활동 당시 그의 일화도 지금까지 자주 회자된다.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모뉴먼트 대집회는 신화와 가깝다. 당시 모인 사람들만 30만 명이었다. 문 총재는 그 해 세계적인 시사지인 <뉴스위크> ‘올해의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문 총재는 축구스타 펠레와의 협조 속에서 이제는 세계적인 국제클럽대항전으로 떠오른 ‘피스컵’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등 전 세계 유명 인사들과 돈독한 친분을 나눴다.
▲ 문 총재는 1990년대 초 고르바초프(사진)와 김일성을 잇따라 독대하는 등 국제적으로 국가원수 이상의 행보를 보였다. 사진제공=통일교 |
▲ 문 총재는 1990년대 초 고르바초프와 김일성(사진)을 잇따라 독대하는 등 국제적으로 국가원수 이상의 행보를 보였다. 사진제공=통일교 |
문 총재가 남북협력사에 남긴 족적도 매우 뚜렷하다. 고르바초프와의 면담 이듬해인 1991년 11월, 그는 김일성 주석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한다. 당시 그는 고향집을 방문하며 헤어졌던 누이들과 해후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문 총재는 방문 당시 자신이 옥살이를 했던 함경도 흥남의 공관에서 김 주석과 면담한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각기 옛 추억이 담긴 ‘언 감자국수’를 나눠 먹으며 깊은 친분을 만들어 나간다. 당시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낚시와 사냥 등 취미 얘기는 물론이고 이산가족, 금강산 개발 등 현안 얘기까지 마음 속 깊은 사연을 나눴다. 나중에는 아예 두 사람이 그 자리에서 ‘형님-동생’으로 불렀다는 후문이다.
이런 인연 덕에 통일교는 현재까지도 북한 현지에 평화자동차공장, 보통강호텔, 세계평화센터 등 여러 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북정부 간 관계와는 별개로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994년 김 주석 사망과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교단 측은 북한에 조문단을 보낸 바 있다. 북한 역시 지난 9월 5일, 문 총재 별세 이틀 만에 김정은의 명의로 교단 측에 조전을 보내왔다.
▲ 2012 피스컵에서 우승한 함부르크 손흥민이 이 대회 개최자 문 총재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사진제공=통일교 |
통일교하면 역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장면이 ‘국제합동결혼식’일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등 전 세계를 무대로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르는 커플들이 문 총재의 축복식을 통해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잠실 주경기장에서 치러진 몇 차례의 국제합동결혼식은 3만여 명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장관을 이룬 바 있다. 지난 3월에도 문 총재의 축복식을 통해 경기 가평군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2500쌍의 합동결혼식이 치러졌다.
문 총재는 생전에 결혼은 하나님이 만든 유일한 기관이며 창조사업의 기반이라고 칭하면서 평화의 출발점으로 강조했다. 특히 그는 세계의 평화와 통합을 위해 인종과 국경을 넘어선 국제적인 교차결혼을 주장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국내 초창기 다문화가정들 상당수는 통일교도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합동결혼식은 이단시비의 한 논쟁점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실제 지난 과거 납치·감금설 등 통일교 합동결혼식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라 터져 나오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문 총재가 별세한 지 나흘째인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소재 통일교 세계교회본부 건물 전경.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7남’에 이의 달지 말라
문선명 총재가 지난 9월 3일 새벽 별세하면서 통일교 후계 구도 및 재단의 향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 문 총재 후계를 둘러싸고 형제들 간 마찰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완충지대 역할을 해왔던 문 총재가 별세함에 따라 고인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의 난’이 재현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통일교 안팎에서는 수조 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재산을 놓고 형제들이 다툼을 벌일 것이란 우려가 파다한 상태다.
문 총재 공식 후계자는 7남 문형진 통일교 세계회장이다. 지난 2010년 6월 문 총재는 “상속자는 문형진이다. 그 외 사람은 이단자요 폭파자다”라는 친필휘호를 공개한 바 있다. 후계와 관련해 잡음이 끊이지 않자 대외적으로 문형진 회장 손을 들어준 것이다. 1979년생인 문 회장은 지난 2007년 12월 문 총재가 직접 목회를 했던 서울 청파동 통일교본부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차세대 지도자로 급부상했고 2008년엔 통일교 세계회장으로 임명돼 일찌감치 문 총재의 종교적 후계자로 낙점됐다.
문형진 회장과 문국진 이사장의 대척점에 서 있는 문현진 씨는 문 총재의 3남이다. 그러나 문 총재의 첫째 둘째 아들이 잇달아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사실상 장남이다. 이 때문에 문 씨가 문 총재 뒤를 이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실제로 문 씨는 2000년부터 문 총재가 주도한 세계평화 활동 전면에 나서면서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문 총재 메시아론에 대한 관점’과 관련해 문형진 회장과 갈등을 빚은 끝에 결국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게 됐다.
통일교 형제들 간 갈등은 지난해 문 씨가 자신의 어머니이자 문 총재 부인인 한학자 여사를 상대로 소송을 내면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당시 문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그룹 계열사의 돈 238억 원이 한 여사가 대표로 있는 단체에 무단 송금됐다며 ‘부당 이득금 반환 소송’을 냈다. 지난해 말에는 문국진 이사장이 맡고 있는 통일교 재단 측이 문 씨 장인을 상대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이처럼 형제들 간 다툼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인지라 통일교 내에서 문 총재 별세 이후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통일교 내에선 후계 구도가 조기에 안정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4~5년 전부터 ‘종교-문형진, 기업-문국진’으로 시스템을 마련하고 대비를 해왔던 만큼 그 충격파가 크지는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후계구도의 핵심 ‘키맨’이라고 할 수 있는 문현진 씨 입지가 통일교 내에서 미미하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통일교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공식적으로 후계자는 문형진 회장이다. 여기에 이견을 다는 교인들은 없다. 또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단이다. 그리고 기업 운영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문국진 이사장이 할 것”이라면서 “후계와 관련해 그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자신한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