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재인 후보가 순회경선 13전 전승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16일 서울경선 모습. 박은숙 기자 |
지난 19일 안철수 전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제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민주통합당(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에게 떨어진 특명 이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앞서 안 후보가 정치판에 처음 등장한 이후 ‘안풍(안철수 바람)’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곤 했지만 이번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 안 후보가 아무런 정치활동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정치인’이었던 것과 달리 이제는 ‘박근혜(새누리당 대선후보) 대항마’ 자리를 놓고 문 후보와 경쟁하는 ‘현실 정치인’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무위 정치’의 특성상 과거에는 안풍이 한 번 불었다가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곤 했지만 안 후보가 본격 대선행보에 나선 이상 이번에 불 안풍이 얼마나 거셀지는 예측하기 힘들다.
안풍을 막기 위해 문 후보가 꺼내들 수 있는 최선의 카드는 변화와 쇄신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민주당 내에서 전략통으로 불리는 서울지역 한 3선 의원은 “안풍의 근원지는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정치 불신, 특히 정당정치에 대한 불신”이라며 “바람의 근원을 없애지 않고 바람을 막겠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겠다는 격”이라고 말했다. 문 후보가 안 후보를 잡기 위해선 안 후보가 가장 경쟁력 있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정치쇄신, 정당쇄신에 승부수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진단에 대해선 문 후보 역시 공감하고 있다. 그 스스로 “저도 두렵기도 하다”고 말할 정도로 그동안의 관행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선대위 구성을 예고하고 있다. ‘통합형 쇄신 선거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고강도의 정치·정당쇄신 프로그램을 이끌어 냄으로써 민주당을 환골탈태시키겠다는 것이다. 그 고민의 결과물은 이미 선대위 조직 체계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 후보 측 대선기획단격인 ‘담쟁이 기획단’의 박영선 기획위원은 21일 선대위 조직도를 발표했다. 문 후보를 중심으로 ‘시민캠프’ ‘미래캠프’ ‘민주캠프’ 등 3대 캠프가 수평적·방사형으로 연결되는 게 특징이다. 기존의 당 중심 선대위에서 벗어나 당과 온라인, 전문가 등 세 개의 바퀴로 굴러가는 체제를 갖춘 것이다. 문 후보 측은 “과거에는 정당이 선대위의 중심축이었지만 이번에는 비중이 3분의 1로 축소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지지자 중심 온·오프라인 캠프 형태를 띠는 시민캠프는 자체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방사형 조직을 갖출 것으로 전해졌다. 박영선 위원은 “시민캠프 내에 시민참여캠페인본부, 시민참여캠페인네트워크, 국민명령1호네트워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네트워크, 2030네트워크 등이 마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구성될 것”이라고 전했다. 아젠다 중심의 전문가 네트워크 형식의 미래캠프 산하에는 문 후보가 대선후보 수락연설에서 밝힌 ‘5개의 문’을 담당할 위원회가 구성된다. 일자리혁명위원회, 복지국가위원회, 경제민주화위원회, 새로운 정치위원회, 평화와 공존위원회 등이 그것이다. 당 조직 중심의 오프라인 캠프 형태의 민주캠프는 총무본부, 기획본부, 소통본부(홍보·미디어), 동행본부(조직·직능), 공감본부(정책)를 기본으로 하되 국민통합본부도 별도로 설치된다.
실질적인 쇄신은 조직 체계 설계가 아니라 인선 과정에서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문 후보 측은 당내 위상과 과거 경력, 선수, 나이 등을 중시했던 선대위 인선 관행에서 탈피할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전문성·개방성·포용성 등을 원칙으로 하되 철저히 ‘일 중심’으로 인선하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거의 관행대로라면 공동선대위원장에 배치돼야 할 이해찬 대표, 경선 경쟁상대였던 손학규·김두관·정세균 후보 등이 전면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아예 선대위원장 직책을 두지 않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같은 인선 과정에서 ‘친노(친노무현) 백의종군론’, ‘당 지도부 2선 후퇴론’ 등이 어떻게 정리될지도 관심사다. 경선 과정에서 비문재인 진영에 섰던 일부 의원들이 과감한 인적 청산을 주장하고 있지만 문 후보 주변에선 “특정 인사를 내치는 ‘마이너스 방식’보다는 당 안팎에서 꼭 필요한 사람을 계파에 구애받지 않고 끌어들이는 ‘플러스 방식’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중론을 이루고 있다. 칼자루를 쥐고 휘두르기보다는 ‘일 중심’의 원칙을 견지해 나가면서 인적쇄신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 문재인 후보가 순회경선 13전 전승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다. 16일 서울경선 모습. 박은숙 기자 |
쇄신형 선대위 구성, 파격적 선대위 인선, 정치쇄신·정당쇄신 프로그램 발표에 이은 문 후보의 반격 카드는 안정감과 책임감이다. 제1 야당 대선후보라는 지위, 현실 정치 경험 등으로 ‘정치 신인’인 안철수 후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당장은 아닐지라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민들이 안 후보의 ‘뿌리없음’을 간파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섞여 있다. 문 후보 측 관계자는 “안 후보가 기성 정치와 정당을 비판하고, 그게 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비판만 한다고 정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면서 “말로 비판하기는 쉬워도 실질적으로 정치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시간이 갈수록 국민들은 문 후보와 안 후보 중 누가 책임 있게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인물인지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안 후보가 아직 ‘정치 평론가’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하지만 문 후보의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현실 정치와 정당에 몸담고 있으면서 정치쇄신·정당쇄신 경쟁에서 전혀 새로운 참신한 후보와 경쟁하는 게 결코 만만찮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 후보의 기반은 새누리당보다 10% 포인트 이상 지지율이 낮은 민주당, 그 안에서도 ‘정권을 빼앗겼던 세력’, ‘패권주의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아 온 친노그룹이다.
몸집이 작아 기동성이 뛰어난 안철수 후보와 달리 거대야당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야 하는 점도 문 후보에겐 부담이다. 선대위 인선에서부터 정치쇄신·정당쇄신 방안 마련에 이르기까지 문 후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당내 세력이 반발하거나 비협조로 일관할 가능성은 언제든지 열려 있다. 쇄신뿐 아니라 통합까지 한꺼번에 이뤄야 하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가 문재인 후보 앞에 놓여 있는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
▲ 안철수 후보가 공식 행보 첫날인 20일 국립현충원 참배를 했다. 안 후보 왼쪽 바로 뒤가 박선숙 전 의원. 박은숙 기자 |
‘문’ 곁에 있을까 ‘안’ 쪽에 붙을까
문재인 후보의 어깨를 처지게 하는 또 하나의 짐은 당내에 ‘이중생활자’가 많아질 것이라는 예상 때문이다. 안철수 후보가 출마 선언 후 본격 대선행보에 들어가면서 몸은 민주당에 있으되 마음은 안 후보 측에 가 있는 의원 및 당직자, 보좌진이 속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칠 수도, 껴안을 수도 없는 이들 이중생활자들이 문 후보에겐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종걸 최고위원은 지난 21일 한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안 후보 측 선거대책본부 총괄역으로 말을 갈아 탄 박선숙 전 의원에 대해 “안 후보 가까이 있는 분들은 이당이다, 저당이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도 가까운 분들이 됐다”며 “(문 후보와 안 후보의 경쟁은) 선의의 경쟁, 동반자적 경쟁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상호 최고위원도 같은 날 다른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박 전 의원에 대해 “당에서 배신감을 느끼고 그런 것은 아니다”며 “그 분이 사심을 갖고 그런 게 아니라 큰 판을 만들어 보겠다는 진정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우 최고위원은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에게 갔던 김민석 전 의원과 박 전 의원을 비교하면서 “그때(2002년)는 우리 후보가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었고, (김 전 의원이) 배를 갈아탄 느낌이었다”며 “이 분(박 전 의원)은 특성이 친정 버리고 가는 분이 아니다”고도 말했다.
박 전 의원이 불과 5개월 전 4·11 국회의원 총선거 때 민주당 사무총장 겸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반응이다. 2002년 당시 김 전 의원을 향해 ‘김민새’라는 격한 단어까지 동원해 가며 비난을 퍼부었던 것과는 너무도 다르다.
일개 의원도 아닌 당 최고위원들 입에서 이 같은 발언이 나오는 것은 문 후보와 안 후보 사이에서 어디로 줄을 설지 망설이고 있는 인사들이 그만큼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그런 사람들을 탓할 수도 없는 분위기가 민주당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가히 ‘용인된 이중생활’이 가능해진 셈이다.
노선과 이념, 정책 면에서 민주당과 큰 차이를 보였던 2002년의 정몽준 후보와 현재의 안 후보는 전혀 다르다는 점에서 이 같은 반응은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후보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지 못하는 상황은 결국 문 후보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게 당내 인사들의 우려다. 안 후보 측으로 많은 인사들이 넘어가는 바람에 곤혹스런 처지에 놓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관계자는 “민평련 멤버인 박 전 의원이 탈당해 안 후보 측으로 가는 바람에 민평련이 엄청나게 욕을 먹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있다”며 “민평련도 더 이상의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문 후보 중심으로 단결하기로 결의한 만큼 안 후보 주변을 얼쩡대는 당내 인사는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